속회공과                              2013년9월13일

바울이 로마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더라.

사도행전 28:11-3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은 굉장히 비참했습니다. 패배한 전쟁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은 바람에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오두막집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아야 했고, 수용소나 임시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독일 백성들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절망과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콜로네(Cologne)라고 하는 도시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회창립 7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700주년이라는 참으로 뜻 깊은 역사를 맞이했지만, 그 교회당은 거의 방치된 폐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창문은 다 깨지고, 기둥은 기우뚱 해서 곧 넘어질 것만 같고, 지붕은 낡아 비가 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극심한 가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독일 국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쓰러져가는 그 예배당 건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700주년이라는 뜻 깊은 역사를 생각해 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인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인근 마을을 퍼저나가더니 어느 새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그 교회에는 3만 명의 독일 국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고통과 실망 속에서 눈물 흘리던 그들의 입술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울려 퍼진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이 이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란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폐허가 되어 쓰러져가던 그 700년 된 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감사가 되살아났고, 그 마음으로 ‘새롭게 독일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짓기 시작했고,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는 작은 믿음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1.사도행전의 종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제목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사역한 사역의 현장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후반부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마지막 사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을 오늘 우리가 읽었는데, 읽으면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건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지만 웬지 마지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된 것도 아니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마무리하겠다는 어떤 종결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무리하는 어떤 글귀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종결 문장이 없이 끝났다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도 사실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평생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처럼, 정말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신앙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28장이지만, 사도 바울 이후 복음을 위해서 사역한 사람들이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3절에 보면, 사도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이름이 더 이상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들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도행전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역에 충성했고, 신앙전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들이 순교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많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사역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서 몇 명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2.사도행전을 왜 성령의 행전이라고 부를까요?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활동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지만, 사실은 사도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도록 역하하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성령사역의 기록’이란 의미에서 ‘성령행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도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목숨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그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도 임하여 감동시키셔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거쳐 땅 끝인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주셨고, 그런 열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사도 바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 로마에 무척이나 가고 싶었지만 쉽게 그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덮어씌운 죄목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을 비방했다는 것과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 거룩한 성전을 더렵혔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1:28)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로마서 9:3) 그런데 동족을 비방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단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가지고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런 오해들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는 사도 바울을 곧 죽일 기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어떤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면 황제에게 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재판이 일시 중지되고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생명의 위협를 느낀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고소했고,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미결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오긴 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긴 하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보며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오늘 말씀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의하면,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유가 허락된 셋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앞인 16절부터 보면, 자기가 머물던 셋집으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결수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 결과에 따라서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구금되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재판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도록 부죄를 입증하기 위한 변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하나 –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유의 몸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지금 형편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날짜를 정하여 다시 사도 바울을 찾아왔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에 머물러 있는 2년 동안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셋집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본문 마지막절인 3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여기에 밀알교회를 세워주셨는가’ 자문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죽음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언젠가 이 땅에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 땅에 정의의 회복 자유의 회복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불의가 판치고 자유를 억압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교회는 성령충만 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된 사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갈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부르시는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좋은 가문에, 사회적인 지위도 좋고 배움도 많은 사람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하나님과 동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그래서 사도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고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신 12명의 제자들은 모두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리고 복음의 역사는 사도 바울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의사 누가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사도행전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실라,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 생명을 바쳐 바울의 사역에 헌신했던 에바브라 디도, 사도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도망처 온 노예였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신실한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 등등. 그 이름을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당한 환란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이라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위대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배당을 훌륭하게 지은 교회가 위대한 교회가 아닙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교회가 위대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을 잊지 않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을 거는 교회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이 고난의 삶일지라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로 쓰임받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명한 신앙고백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미국의 에이든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토저 목사님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아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의 덕목이 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디선가, 이 사람들이 아닌 어떤 사람들을 복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 수면제이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지금 복 주신다’가 아니라, ‘언젠가 복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오늘 내 삶의 현장인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복해 주실 거야.’ 라는 믿음이고, 세 번째는 ‘바로 나’가 아닌 ‘어떤 누군가를 복 주실 거야’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로 여기에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것이란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언젠가 복 주시겠지, 어디선가 복 주 시겠지, 누군가는 복을 받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하는 수면제라고 말합니다. 이건 분명 불신앙입니다. 신앙 같지만 신앙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서 나에게 복 주실 것도 믿습니까?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쓰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언젠가는 쓰시겠지’가 아닙니다. 지금 내 모습 이 대로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복 주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에 동역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밀알교회를 통해서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갈 오늘의 사도 바울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의 누가, 오늘의 디모데, 오늘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늘의 오네시모를 찾고 계십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환자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틀밖에 살지 못합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다른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의사, 정말 신뢰가 가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 말고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당신네 교회 말고 다른 교회였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신뢰받는 그리스도인, 세상에 신뢰를 주는 교회가 사도행전 적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요, 오늘 우리 시대가 간절히 찾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