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7월12일

바울이 변명 하다.

사도행전24장10절23절

지난 시간 우리는 변호사 더둘로가 총독 벨릭스에게 아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방인에게 가서 대제사장 요나단까지 살해한 총독에게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는 총독에게 – 당신 덕분에 평안을 누리오, 당신 덕분에 민족이 많이 개혁되었고, 어디서나 감사하고 있소. 세상 말로 소름끼치고 닭살 돋는 아첨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의 자세는 다릅니다. 더둘로가 통치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바울은 단순히 재판장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합니다.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 하나이다.”

머리로 표시했다는 표현은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 벨릭스가 고개 짓으로 바울에게 변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했다는 이야기이고 ‘기쁘게 변명한다’는 말은 재판장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표시한 것일 뿐입니다. 더둘로의 비굴한 아첨에 비해 바울은 절제되고 점잖은 인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를 앞세워서 바울을 세 가지 죄로 고소하는데 그것은 소요죄, 나사렛 이단의 괴수, 성전 모독죄입니다.

 

1. 바울은 더둘로의 고소에 어떻게 변명 합니까?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11절에서 바울은 소요죄로 고소한 것에 대해 변명합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구절은 8절에서 더둘로도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는 말을 했으므로 바울이나 더둘로 모두 벨릭스가 알 수 있는 일이라 말하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진실이라면 한 사람은 거짓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를 말합니다. “예배하러” 바울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둘로가 자신을 정치범-소요죄로 고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열 이틀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열 이틀 밖에 머물지 않았는데 그 짧은 기간에 무슨 소요를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열 이틀 가운데서도 나흘 동안은 붙잡혀 있었고 칠 일간은 성결례(聖潔禮)를 행하였는데 내가 언제 사람을 만나서 선동 할 수가 있었겠느냐? 소요죄 – 정치적 반란을 꾀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 당신이 나를 정치적 반란자로 고발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더둘로가 웅변가적이고 선동적이었다면 바울의 변명은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12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은 자신이 성전이나 회당 또는 성중 어디에서고 사람들을 만나서 선동한 적도, 소동케 한 적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내가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성내에서 누구와 논쟁을 하거나 군중을 선동해서 모으거나 한 일이 있으면 본 사람이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할 수 있으면 해보라 이겁니다. 정치가들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소요죄 – 특별히 벨릭스같이 잔인하고 권력지향적인 총독이 분명 쉽게 넘어가지 않을 정치적 소요죄에 대하여 바울은 논리적으로 차분차분하게 풀어갑니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異端)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4-15절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소에 대한 바울의 변명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치적 문제에 이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주목할 것은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도(道)라고 정정하여 이 도가 유대교가 말하는 하나님도 섬기고 유대교의 율법과 유대교의 선지자의 글 모두를 다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가 유대교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하나님, 그 율법, 그 선지자의 글 모두를 믿는데 어떻게 이단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만일 이 도를 이단이라 한다면 유대교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도 담겨져 있고 유대교가 로마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라면 이 도도 당연히 연속선상에서 로마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사실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둘로가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할 때 정치적 집단이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도록 사용한데 대해 바울은 이 문제는 반로마적인 정치 문제가 아니라 종교문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바울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중 사두개파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나도 부활을 믿는데 신앙의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16절은 믿음 안에서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는 바울의 고백인데 후에 다시 생각합니다.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은 세 번째 성전 모독죄에 대한 변명을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몇 가지 목적과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이미 11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갔다고 말했습니다. 17절에서는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 흩어져 있는 이방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할 목적도 있음을 밝혔습니다.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를 돕는 것이 민족을 돕는 것으로 확대 생각한 듯 합니다. 또 예루살렘 방문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를 만난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해하여 야단하고 있으니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비용을 바울이 부담하여 결례를 행하라 해서 결례를 했음도 밝혔습니다. ‘바로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성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결례를 행했을 뿐 누구와의 모임도 없었고 소동도 없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니 보았을 것 아니냐?’하고 자기 변론을 계속합니다. 바로 이때 – 바울이 성전에 있었던 그때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이 이방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이방인 금지구역인 이스라엘의 뜰에도 함께 들어갔던 것 아닌가 오해하여 소동을 일으켰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당사자가 총독 당신 앞에 와서 고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 또 내가 공회에서 재판 받을 때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말하라. 나는 부활 얘기 밖에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내가 성전에 이방인과 함께 있는 것 보았으면 본 사람이 직접 고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것도 아니라면 옆에서 본 사람이라도 있으면 증인이라도 세워라. 이 얘기입니다.

바울은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은 더둘로를 앞세운 고소가 모두 다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한쪽이 진실이라면 한쪽은 거짓입니다. 유대교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새로운 기독교의 기수 바울을 어떻게 하든 없애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정치문제와 결부시켜 고소했던 아나니아 일행의 고소는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총독 벨릭스가 도(道)에 대하여 어떻게 더 자세히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치가로서 지내다보니깐 알게 되었는지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 때문이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유도 주고, 친지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벨릭스의 공식적인 재판은 일단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벨릭스의 인품이나 이제까지 해왔던 것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쁘지 않은 결과이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두 해를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16절 말씀입니다.

 

2. 바울이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16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했습니다. ‘힘쓰노라’는 희랍어로는 ‘아스코‘인데,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늘 그렇게 살려고 애썼다는 말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려고 애썼다는 얘기이지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부단히’-끊임없이 애썼습니다.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니다’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살았다’고 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려고 최선을 다해 힘썼다’고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왜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 잘 섬기려고 살았고, 하나님 바로 섬기려다가 핍박받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세상 살면서 오는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죄 때문에 오는 고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눈먼 사람을 만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뭐라 하셨어요? ‘누구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도 죄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는 사실 또한 꼭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욥의 경우 참으로 의롭게 살았습니다. 욥을 일컬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리 인정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자녀도 다 잃어버립니다. 건강도 잃어버립니다. 아내도 떠나버립니다. 친구도 떠나버립니다.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고난을 벗어나라고 하지만 욥은 인정할 죄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 충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죄 없다’ 이겁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 ‘나는 죄 없다’-자기의(自己義)를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께도 범죄한 것이 없고 사람들에게 사기치거나 해롭게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지요.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지요.

그러나 이것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은 것도 커다란 죄라는 사실.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인생에서 커다란 손해를 보았을 때, 상대방 욕하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회개부터 하세요. 그래야 회복됩니다. ‘섬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배’가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가 Service-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뭘 바라고 달라고 한다면 제대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섬기다 보면 주시지요.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하다 보니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대로 섬기려 하다 보면 어려움이 올 수도 있어요.

또 하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양심을 지키기에 힘쓰노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예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같은 크기로 말씀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에게 하는 것 보면 한참 모자라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신앙이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는 기가 막힌 감동을 주는데 하나님께는 별 감동이 못되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 모두 중요하지요.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1에서도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바울이 수 없는 고난 중에서 – 감옥에도 수없이 갇히고, 매도 맞고, 온갖 시련 다 당하면서도 어떻게 그리 당당할 수가 있습니까? 한편 생각해보면 예수 믿으면서 감옥 가고 예수 믿으면서 매 맞고, 예수 믿으면서 시련 당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예수 믿다가 뭔 일 당하면 ‘하나님 영광 가린다’고 고개 떨구는 사람 있지요. 예수 믿는 사람 – 모든 세상 일 다 성공하는 것 아닙니다. 바울은 온갖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세상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써 왔기 때문에’. 거짓은 바로 드러납니다. 언제인가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당당하지 못합니까? 고난과 시련 앞에서 왜 당당할 수가 없습니까? 바울처럼 당당하면 좋겠는데 속상하게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힘이 없습니까? 오늘 날 우리 기독교가 왜 사회에서 이런 저런 비난을 받으면서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교회 숫자가 적어서요? 신앙의 열정이 없어서요?

세상 살면서 항상 당당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당당하지 못하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없어서요? 집이 작아서요? 사회적 지위가 없어서요? 아니지요. 왜 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앙으로 산다하면서 “세상사는 것 다 그렇고 그렇지”하면서 적당히 타협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적당히 감춥니다. 남이 가는 길이면 생각 없이 나도 갑니다. 신앙 생활하는 나와 신앙생활하지 않는 저 사람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뭔가 떳떳치가 못하니까 당당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겸손하기도 해야 하지만 당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우리 성도들이 어디서나 언제나 좀 당당해졌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3.바울의 삶의 태도에서 배워야 점은?

바울이 더둘로의 고소에 대해 논리적으로 잘 답변해서 재판은 그냥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변명이 받아들여지는 쪽으로 끝이 납니다. 바울의 변명 중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기를 힘 썼노라는 고백을 깊이 생각합시다. 바울의 삶에서 배워야 할 태도는 욕망부터 버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시간 지나면 욕망이 별 것 아닙니다. 이것 못 버리면 평생 고생합니다. 돈, 명예, 지위에 대한 꿈은 갖더라도 욕망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비전과 욕망은 다르지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밀알 인들이 가는 곳마다 당당함이 있기 고대 합니다. 마지막 승리는 권모술수와 욕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