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1월29일

 

율법의 한계와 하나님의 의(義)

로마서3장19절~31절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30년간 목회 하면서 큰 은혜를 끼친 로이드 존스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를 강해할 때는 1장 1절에서 시작하지 않고 3장 20절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교리를 하루빨리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를 전하고 싶어서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공부 할 말씀은 로마서 중에서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시인 윌리엄 카우퍼(Cowper)는 “내가 살아서 무 엇 하나?” 하면서 괴로워하다가 좌절 속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창문가 의자에 앉아서 성경을 펼쳤는데 로마서 3장 25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절). 카우퍼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나는 큰 힘을 얻었다. 의의 태양 빛이 전혀 가림 없이 내게 비추어 졌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용서와 완전 칭의(稱義)를 위해서 이루신 속죄를 보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감사와 기쁨 때문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목이 메어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과 경의가 넘치는 채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하늘을 쳐다 볼 뿐이었다.” 그 날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 공부 할 말씀은 율법의 한계와 하나님의 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칼뱅은 이 부분을 ‘신학의 정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1.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설명 하시오.

 

오늘 말씀이 주는 첫 번째 주제는 율법은 한계가 있으며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바울 시대에는 율법만 어기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법에만 안 걸리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23절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율법 이전에 죄인이며 율법으로는 속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규범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 줄 몰랐는데 율법을 보면서 죄를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할 뿐 율법에는 속죄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자가 보혈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율법주의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만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섭리 안에서만 하나님의 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인간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수양으로도, 고행으로도, 선행으로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의 한계란 율법에 의해서는 인간의 죄악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인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지만 설령 다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 피만이 인간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2. 무엇이 하나님의 의 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봐주시는 것입니다. 죄 없는 것처럼 취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25절의 말씀을 함께 보십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므로 자기가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처리하시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봐 주시니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죽음이라는 죄 값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으셨습니다.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공짜는 아닙니다. 값싼 은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등록금을 대주면 아들은 공짜로 대학에 다닙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공짜입니까? 대신 갚은 것이라고 공짜라고 생각한다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캠벨 몰간 목사님은 어느 광부에게 칭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 주시며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광부는 “제가 돈을 내지 않았는데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돈 없이 받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공짜 중에 진짜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광부가 매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갱도로 내려가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었죠? 돈은 얼마나 냈습니까?” “돈은 내지 않았는데요!” “왜 돈을 내지 않고 내려갔지요? 왜 공짜로 내려갔지요?” “네? 저야 공짜로 내려갔지만 우리 주인이 엘리베이터를 만드느라고 큰돈을 썼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지만 천국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준비하시느라 하나님은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광부는 그 말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흘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화목 제물로 삼으셨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피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신학을 하시는 분, 운동권에 속해 있는 목사, 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나 이한열의 피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모하다 죽은 아이들의 피를 찬양하면서 “열사여 부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데모하다가 피 흘리시고 죽으신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전 인류를 위한 대속의 피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유효합니다. 이 구속의 은혜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차별이 없습니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인종이건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성경은 죄의 보편성도 이야기 하지만 구속의 보편성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3:16). 할렐루야!

 

믿음의 법을 자랑하라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법을 자랑해야 합니다. 율법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의 법을 자랑해야 합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또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의 자랑은 믿음의 법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력종교를 찬양합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신의 경지에 이르고 구원받으려는 노력이 훨씬 종교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가능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현가능성이 없는데 형식만 그럴 듯하면 무엇 합니까? 파리가 아무리 잘 날아도 미국까지 날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훔쳐 타면 파리는 10시간이면 미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파리가 혼자 날아가다가 울릉도 앞바다에 빠져 죽는다면 그것이 자랑이 되겠습니까?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고 애쓰다가 헛수고로 끝난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오직 은총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의 법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은총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믿음의 법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에게 율법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율법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능력은 없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다른 차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믿음 안에서 율법을 굳게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바울은 율법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구원의 능력에 관련해서만 그렇습니다.

 

무조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법만 강조하고 율법을 포기하는 율법무용론자, 도덕무용론자(道德無用論者)가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도 율법을 굳게 세울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격이 형성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신앙인격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입니다. 그 첫째가 복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드리는데 목적이 복 받는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드려도 그 목적입니다. 그런 분들은 헌금을 드려도 복 받기 위해 드립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신앙인격 성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면서도 신앙인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아도 상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럽게 됩니다. 율법에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폐기하지 마십시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총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의 법을 자랑하되 율법을 굳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