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1월22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3장9절18절

 

스위스에서 고속도로를 개통하고 톨게이트를 백 번째로 통과하는 차량에게 일천프랑을 주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백 번째 통과차량이 포착되었습니다. 담당자는 일천 프랑을 주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차는 고속도로 개통직후 우리 톨게이트를 백 번째로 통과 한 차량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운 금을 일천 프랑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네, 운전면허증 따는데 쓰겠습니다.” 그때 옆에 탔던 부인이 얼른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 이 사람은요, 술만 먹으면 언제나 이렇게 횡설수설한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고 있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던 귀를 먹은 노인이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 훔친 차를 타고는 멀리 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더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죄 있는지 없는지 모를 뿐이지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그런데 사실은 둘 다 죄인이다. 두 종류의 죄인이 있을 뿐 의인은 없다.”

 

오늘 공부 할 로마서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인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죄인 됨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1.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 됨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먼저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다음에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나서 이제는 인류 전체가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특별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회개하지만 뼈저리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구원받기 원하는 여인이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는 여인에게 사람은 모두 죄인임을 일깨워주고 따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나쁜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한마디도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여인에게 구원받기 싫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나쁜 죄인이 아닙니다. 저는 좋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믿든 안 믿든 자신은 꽤나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의롭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상대적 평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평가치가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좀 의로워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상대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개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고도 부족함을 고백해야 옳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99가지 잘해도 한 가지만 잘못하면 죄인입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께 나와 영생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모든 계명을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다 잘했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가 부족하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 나쁜 사람들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 많은데 나는 왜 어려운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도 그렇습니까? 사실은 나도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 알아야 지금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 왜 바울은 의인이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말씀의 중심이신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이제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18절 사이에 ‘없다’는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말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것은 원죄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인간의 죄 성을 심상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원죄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만 없으면 의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목사 모노드도 처음에는 바울이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니까 이 구절들이 구구절절 진실 된 말씀으로 부딪쳐 왔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느낄 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똑같이 인정하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깡그리 없어졌느냐 아니면 그림자는 남아 있느냐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전적 타락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자격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두 동창생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죽마고우였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그 우정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관계였습니다. 대학교까지 활동도 같이 하고 졸업 후에도 한때 사업도 같이 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보증까지 서줬던 친구를 배반하고 많은 돈을 챙겨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뼈아픈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증을 서 준 빚을 갚느라고 10년간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본인도 충격을 받았겠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과연 이렇게 배신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람은 다 그런 것인가?’라고 회의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믿음을 두었다가는 실망하고 맙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교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만큼 약한 존재요, 타락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그게 차라리 마음 편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제 본문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전적 타락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11절).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물론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전 존재는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고 보여주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또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12절). 정말로 세상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을 행하는 하나도 없다고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란 불순한 동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선행 속에는 불순한 동기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심성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3절). 이것은 언어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 합니다”(14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존경 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이중적인 마음을 가질 때 이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 됩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말의 순도가 100%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고 하였습니다. 발은 행동을 상징합니다. 말로 해결 안 되면 발로 해결합니다. 발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먹에 힘이 있으면 좋은데 써야 합니다. 검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지나가던 사람이 기분 나쁘게 한다고 칼을 휘둘러 두 팔을 잘랐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돈도 많으면 힘이 됩니다. 이 힘을 잘 써야 하는데 사람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좋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추악한 모습입니다. 생각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말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힘은 있으면 엉뚱한 곳에 써버립니다. 쓸 곳에 써야 가치가 있는데 헛된 일로 낭비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18절).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 자체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망이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3.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위해 무엇을 하라고 권면 합니까?

 

이제는 죄를 다스리라는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죄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결코 가벼이 볼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죄의 권세를 말했습니다.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어서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우리를 악으로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로마서3장9절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말하면서 “죄 아래”있는 인간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인 죄의 뿌리는 영원히 인간과 함께 합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권세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형편을 헤아려 보십시다. 죄를 다스리지 않고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도 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죄의 아비 마귀의 자식이 되어서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어느 집안이 도박으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도박을 해서 문전옥답과 집을 몽땅 날렸습니다. 그 집에 3대째 도박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하고, 아버지도 도박하다 집 날리고, 그런데도 아들까지 도박을 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해서 자신이 고생하여 산다.’고 원망하면서도 자신도 도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댄 다음에는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도박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의 권세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지가 강하고 이성이 분명한 분이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다스릴 힘을 주십니다. 성령 충만 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때 참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야 참 평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