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과                                       2013년10월4일

복음에 빚진 자 바울

로마서1장8절~15절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 죄와 젊은이를 선동한다는 죄”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종 순간은 매우 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차가운 감방에 누워있고 그 옆에는 친구이자 제자인 크리토(Crito)가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말인 듯 매우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크리토, 내 청을 하나 들어주게나.” 크리토는 말해보라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에게서 수탉 한 마리 빌려먹은 빚이 있네. 자네가 내 대신 갚 아 주 게나.” 마지막 남은 빚을 모두 갚아야 겠다는 철학자의 양심을 봅니다. 빚은 갚지 않으면 불편한 것입니다. 크든 작든 빚은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힘겹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분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누울 때면 이제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에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견딜까?” 하며 한숨을 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빚은 무서운 것입니다. 빚이 주는 부담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공부 할 성경 말씀을 보면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통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부담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잘 못 갖는 느낌을 바울은 민감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를 존경하게 됩니다.

오늘 공부 할 성경 말씀은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어 하는 심경을 토로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를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로마교회를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교회의 믿음은 널리 전해져 칭송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났듯이 로마교회도 좋은 소문을 얻고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도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기도 제목 중에 로마의 교회가 늘 들어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를 부탁 받아도 잊기 쉽습니다. 그런데 잊지 않고 기도했으니 얼마나 사랑하는 것입니까? 저도 수첩을 가지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기도하게 되는 제목도 있습니다. 그것은 관심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로마의 좋은 교회에 가서 목회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직 복음 전파에 뜻이 있었을 뿐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듯이 그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빈번히 로마를 왕래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전파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공부할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바울의 로마교회 방문 목적은?

바울이 왜 그토록 로마교회에 가고 싶어했습니까? 그 첫 번째 이유가 11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영적인 선물을 나누어주고 싶어합니다. 물론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여러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있습니다. 지혜, 지식, 방언, 예언, 능력, 믿음, 신유, 통역, 영분별 등이 있습니다. 또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나누어주어 더욱 견고케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은사들을 더욱 풍족히 받아 더욱 견고한 믿음, 견고한 교회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로마 방문의 두 번째 목적은 12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받으려 함이라.” 성도의 교제는 피차에 위로가 됩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으나 받는 것도 많습니다. 바울이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교제가 필요합니다. 자주 만나야 합니다.

로마 방문은 세 번째 목적은 13절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은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나니 너희 중에서도 나를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바울은 로마에서도 복음 증거의 결실을 얻고 싶었습니다. 바울이 원래는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기로 작정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인도하여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는 유럽의 중심 로마에서도 복음의 열매를 얻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큰 그림을 그리려는 바울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튼 복음 전파의 큰 성취에 대한 열정도 필요합니다.

로마 방문의 네 번째 목적은 14절에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다 빚진 자로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또 어느 민족의 사람이건 모두에게 복음의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특히 이방인들에게 그 빚을 갚고자 했습니다. 이방에 빚을 갚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방에 복음의 빚을 갚고 싶어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열정에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바울이 복음에 빚졌다.” 라는 의미는?

그러면 이제는 복음의 빚진 자 바울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는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들에게 바울 빚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빚을 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순간부터 이 복된 소식을 온 천하에 전해야겠다는 빚진 자의 의식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죽는 날까지 그 빚을 갚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이 복음의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오늘 성경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시작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순교시킬 때 앞에 섰던 사람입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핍박해도 보통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죄가 많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들어 복음 전하는 사도로 써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빚진 자라는 생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빚진 자라는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수고해도 공로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빚을 갚는데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내 것을 주어야 공로가 있지 빚을 갚는데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 평생 갚아도 못 다 갚을 빚을 조금씩 갚고 있을 뿐인데 무슨 공로를 내세우겠습니까? 오직 겸손히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큰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그리스도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이 값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살을 찢기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당한 죄값을 주님께서 치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질 많이 주신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건강주신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성공하게 하신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이 큰 은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선교사들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복음 전파가 쉽지 않았습니다.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전래의 과정에도 많은 순교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 모두가 은혜요, 우리가 갚아야 할 빚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빚을 갚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열정은?

이제는 복음의 빚을 갚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방문에 대하여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로마에 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도 계속 노력했습니다.

그는 쉽게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빚을 갚는 일에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은 없으면 안 쓰면 되지만 빚은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길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못 가게 되면 안가도 그만입니다. 누가 억지로 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빚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바울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은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나니.”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심심해서 장난 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열정이 있는 것을 알라도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의 속에서 나오는 열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 이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의 의식이 부족합니다. 열정을 갖고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빚은 갚아야 합니다. 열정을 갖고 갚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닭 한 마리의 빚도 갚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이 어느 정도입니까? 닭 한 마리밖에도 안 되는 것입니까? 이제는 복음의 빚을 갚으십시다. 열정을 갖고 갚으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