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0월18일

모른다고 핑케 할 수 없는 하나님

로마서1장18절 ~23절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 받는 다는 이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은 한결 같이 같습니다. “목사님, 이순신 제독이나 세종대왕처럼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소식을 못듣고 죽은 이들의 구원은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그럴 때 마다 간단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구원 받을 런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을 것이고 거역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이 문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합니다.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될까? 공로가 많으니 구원해 주실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오늘 공부할 로마서 말씀은 명쾌한 해답을 줍니다. 오늘 공부 할 성경은 자연계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수계시만 주시지 않고 자연계시도 주셨습니다. 이 자연 계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든 핑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연계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자연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9-20절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19절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특별계시에 의하지 않고도 자연인에게 알려진 신적 지식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은 좋으시다 는 것,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을 인간의 본성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으나 그 이성의 타락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칼 바르트는 “성서 외에 하나님을 아는 길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밀 브룬너는 “사람은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신성이 사람에게 남아 있다”며 자연계시의 가능성을 상당부분 인정하였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1943년부터 브룬너와 바르트가 서로 논문을 써서 변론했던 자연신앙 논쟁의 중점이 되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계시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했고, 또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이 자연계시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시가 전부는 아니지만 특수계시로 인해 자연계시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시를 분명 언급한 이상 자연계시를 인정하고 잘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자연 피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놀랍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자연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연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아름다움과 신비가 있습니다. 놀라운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정확한 설계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입니다.

<창조는 과학적인 사실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지구의 거리는 지구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떨어져 있다.” 태양의 표면의 온도는 섭씨 1000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지구와의 거리가 9,300만 마일이나 되니까 이 정도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모두 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조금만 더 멀었더라도 모두 얼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도는데 꼿꼿하게 서서 도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23.5도쯤 기울어져서 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전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태양이 북반구에 가까워지고, 어떤 때는 남반구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만들어 줍니다. 매일 겨울이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매일 여름이면 또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깊은 생각에 잠긴 여인처럼 고개를 갸우뚱하고 돌고 있는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보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천체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신체부자유자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아인슈타인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빅뱅(Big Bang), 즉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큰 폭발로 우주가 생겨났다는 가능성을 일축합니다. 그는 머리 속에서 50페이지 분량의 방정식을 계산하는 천재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기원에 종교적 암시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별들 속에 이산화탄소가 형성되지만 산소로 바뀌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무신론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원자가 0.5%만 바뀌어도 생명체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고는 우주의 모든 것을 계산하는 슈퍼지성(Super calculating intellect)이 있다고 결론도 내렸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과학자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하나님의 피조물의 세계에서 신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가 가득합니다. 발견하는 이들은 무신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2.바울은 어떻게 어리석은 자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입니다.

첫째,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첫째 부류는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불경건한 사람입니다. 불 경건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며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오직 아버지의 은혜를 모르고 내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떠드는 미련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치도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시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도지사만 만나도 고개를 숙이고 굽신  거리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하물며 천지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배하지 않는 것은 불경입니다.

셋째,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quot; 고 하였습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신비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거절하고 피조물을 신성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전거를 사주신 부모님을 제쳐놓고 자전거만 좋아서 못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디를 가든 우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많은 것은 사람들에게 종교성, 즉 신성에 대한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야만족이라도, 아무리 야수적인 종족이라도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조차 없는 민족은 없다. 비천한 동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사람들도 약간의 종교성은 가지고 있다. 식인쓸俑?그들 나름대로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배의 대상을 바로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만들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상숭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손에 놓으려는 욕망입니다. 사람이 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우상을 세우고 경배합니다. 우상숭배란 자신을 신에게 드리고 섬기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의 목적 때문에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목적은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상 숭배자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3.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 인간의 본성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배하지 않는 사람, 또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혈기 내는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영원히 죽이는 지옥을 설계하실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지옥이 있더라도 교도소같이 잠시 가두는 곳이지 종국에는 모두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을 깊이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공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차적 의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엄위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엄마만큼도 야단치지 못하는 아버지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현세적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류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현세적 심판의 영원한 미래의 심판의 전주곡입니다. 이 현재 심판이 절정에 이르러 최후의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현재의 심판은 미래의 심판을 피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숭배를 하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 중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 그가 쓴 창세기 주석이나 로마서 주석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죄악 위에 그대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나타납니다. 그의 글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합니다. 현세의 심판이든 미래의 심판이든 가벼이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세계 제 1차 대전이 터지기 전의 신학적 상황은 형편없었습니다. 구원 문제는 제쳐놓고 윤리문제만 다뤘습니다. 영혼구원보다 사회구원이 우선 이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교회는 타락하고 무능해지고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때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제야 교회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신학자들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물러가고 다시 정통주의 신학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지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듯이 떠들어대던 소리가 쏙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아래서 새로이 신학적 각성을 했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을 섬김의 구체적인 방법은 정의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가운데 들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정의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는 가장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인류 사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로 축으로 엮여진 삶의 교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계시가 없었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도, 예수를 몰랐더라고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섬기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은총을 받아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