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0월11일

 

복음은 구원의 능력

로마서1장 16절 ~ 17절

 

쿠퍼라는 시인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비운의 생애였습니다. 한번은 너무 절망한 나머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하고 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강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비통한 심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다락방에 올라가 석가래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어 뛰어 내렸지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서재로 가서 칼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칼을 가슴에 대고 앞으로 넘어졌지만 갈빗대만 조금 다쳤을 뿐입니다. 그는 또다시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늦게 쓴 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그때 갑자기 방안에서 주님의 모습과 그의 사랑이 충만함을 느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외쳤다. ‘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여!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영혼을 구원하여 주소서.’ 그러자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생명과 소망이 솟아남을 느꼈다. 이제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내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로마서 1장 16∼17절의 본문은 복음의 능력을 소재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복음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예찬합니다.

 

1.바울은 왜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유대인에게도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헬라인에게도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 확신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예수 믿는 것이 당당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처음 들어가던 시대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로마에서도 그랬고 한국에서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당시에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다 놔두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켜 우리를 구원하셨느냐고 창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복음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높이 걸어 놓았습니다. 제단에도 십자가를 걸었습니다. 목에도 십자가를 걸고 다닙니다. 그러나 실제의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로마인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약소민족 중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자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재판절차도 약식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재판 일심하고 이심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잘못을 신중하게 가리는 그런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체포하고 아침에 재판 끝내고 9시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과소평가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기는커녕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로마의 철학은 힘의 철학이었습니다. 그 힘의 철학 앞에 헬라의 지성적 철학이 무너졌습니다. 그 힘의 철학 앞에 히브리의 신앙의 철학도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때로는 힘앞에 지성도 신앙도 무기력하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힘이 진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로마의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군사력, 경제력에 의하여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성이나 신앙은 과소평가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회사역이 무엇 하는 것인가? 파출소 30개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 교회도 생산성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생산하는 것일까?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민중들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감각이나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왔습니다.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새 사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고, 평화를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보화였습니다.

 

바울도 이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전했습니다. 힘의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에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외쳤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돈이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출세를 해야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험하신 분들은 압니다. 복음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압니다. 그 맛을 압니다. 복음의 맛이 얼마나 좋은지를 압니다. 바울이 그 능력과 그 맛을 체험한 것입니다. 석교 가족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복음은 왜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6절). 이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상식도 아니요, 가르침도 아닙니다. 복음은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능력입니다. 강도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고재봉 같은 사람도 새사람을 만드는 능력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울적했던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능력입니다. 걱정에 매였던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는 능력입니다. 미운 마음이 가득한 사람에게 사랑하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스스로 낙심하여 좌절한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능력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절망하는 사람이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이래서 용기도 얻고, 힘도 얻고, 마음의 병도 고칩니다. 육신의 질병도 고침을 받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능력이란 말의 원어는 ‘두나미스’인데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곡괭이 가지고는 파낼 수 없는 죄의 뿌리도 다이너마이트 같은 복음의 능력으로 산산조각 낼 수 있습니다. 도덕적 노력으로는 10년이 가도 안되던 난공사가 복음의 능력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체험해 보아야 압니다. 그래서 체험적 신앙이 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으로 복음의 능력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육체적 환란에서 건지는 것도 큰 능력이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 변화, 기적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영적인 변화가 더 소중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 것도 귀하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죄인을 구원하여 축복의 자녀로 삼으신 복음의 능력이 더욱 귀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아도 얼마든지 구원합니다. 사형수라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촉박한 시간임에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모든 상황, 모든 조건을 초월합니다. 복음의 능력 앞에는 구제불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이 구제불능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의 능력을 찬양합시다.

 

3.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란?

 

이제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원천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어쩔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의가 모든 것을 감싸십니다. 모든 허물을 덮으십니다.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의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많이 배울 수록 인간의 의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철학자들도 인간의 의에 관심을 갖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의를 찾아 나섰습니다. 유교도 인간의 의를 다루었습니다. 불교도 인간의 의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로는 스스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면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현자도 없고 성자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스스로의 의를 세워서 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덧입혀 주심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죄값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 받고 대신 하나님의 의로 옷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죄없는 것처럼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역할입니다. 불교의 정토정도 죄사함의 자비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정토정의 근거는 자비입니다. 용서하심의 근거가 시작부터 끝까지 자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지만 단순히 자비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자비로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 덧입힘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 새로워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17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신자의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어거스틴).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믿음에”는 “오직 믿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호르). “믿음의 기초 위에서만”이라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베렛). “첫째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존 녹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받음이 오직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의를 믿는데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신인협동설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100%와 인간의 믿음 100%로 구원받음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옳은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믿음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에 비하면 인간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가 있다고 합니다. 9시간만 가면 하와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표를 사다 주면서 다녀오라고 합니다. 이제 할 일은 이 비행기를 믿고 타는 것입니다 타기만 하면 하와이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행기를 믿고 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비행기가 준비된 모든 과정입니다. 또 차비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비하면 믿고 탄다는 것은 큰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잊지 말고 찬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