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신석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제일 늦게 참여한 인사가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 “맨 나중에 참가했기에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의지와 열심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렬했다. 그가 서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형제’가 그를 만류하며 “제가 이 문제로 어떤 선생께 여쭈었더니 그 선생님 말씀이 시기상조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이미 그는 홍천 목회 때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른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치임을 깨달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있을 때 기쁨으로 그 열매를 거둘 자가 나온다는 것이다(시 126:5-6). 그는 지금 눈물로 ‘독립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담당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래야 훗날 후손들 가운데 기쁨으로 ‘독립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을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석구는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가 되려는 각오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죽을 각오’로 참여한 것이다. 그가 체포되어 고문당해 죽거나 사형당해 죽으면 그의 희생으로 그를 아는 수천 수백 명 친구의 마음 속에 ‘독립 정신’의 씨앗이 심어질 것이요. 그도 안 되면 자기 삼남매 마음속에라도 심어질 것을 바라보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했다. 이처럼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기에 그는 3월 1일 선언식과 그 이후 재판 과정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독립 의지를 밝혔고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이덕주, 「출이독립 – 함께 읽는 독립운동가 신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