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구걸하는 사람이 지나갈 때가 있다. 보통은 돈을 줄까 말까, 얼마를 줄까 고민하는데, 어느 날은 그 사람이 들려주는 음악이 찬송가라는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왜 저 사람은 찬송가를 들려줄까?” 답은 간단했다. 동정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주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리라. 걸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무척 기뻤다.
1998년 한국 교회는 IMF 경제위기 때 밥솥을 들고 나가서 실직자와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일에 앞장섰다. 북한이 식량위기를 겪으면서부터 그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처럼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남아 있고 교회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참 교회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때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칭송하고 두려워했다(사도행전 2장). 교회가 교회답다면, 세상은 교회를 칭송하고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에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사와 장로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버려진 소금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다.
초대 교회는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혜 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교회는 칭송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 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데도 교회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의 본연의 모습은 호화스러운 예배당을 짓고 그 예배당을 “지혜 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영적인 속박과 물질적인 속박을 깨뜨리시고 그들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교회 내에서 그 일이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버려진 소금과 같은 처지를 벗어나려면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단지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물질적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은 교회에 가면 해결 받는다는 소문이 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서 “떵떵거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지혜 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좀 “주눅 들어” 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세상 사람들은 다시 교회를 칭송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 호산나 칼럼, 전강수 대구 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