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과 2013년9월6일

 

“멜리데 섬에 오르다”

사도행전 28:1-15

 

육지에 상륙한 바울 일행은 그곳이 멜리데(Malta)섬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사람들은 매우 친절해서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지자 자기들에게 낯선 사람들인 바울 일행에게 불을 피워 줌으로써 몸을 녹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울도 몸을 녹이기 위해 불 옆에 있었고, 불에 넣기 위해 땔감 나무를 집어넣는 순간 뱀이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멜리데 섬사람들은 그 뱀이 독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믿어온대로 바울은 신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이 죽지 않자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루스드라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자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하려고 하기보다 신의 사랑을 입은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멜리데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Poblius)의 집에서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해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바울을 통해 고침을 받았고, 바울 일행이 겨울을 보내고 로마로 떠날 때가 되자,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잘 대접하고 배에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보낸 바울 일행은 디오스구로(Dioskouroi)라는 배를 타고 수라구사(Syracuse)에 도착,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다가 레기온(Rhegium)에 이르렀고 다시 레기온에서 남풍에 의지하여 340km 떨어져 있는 보디올(Puteoli)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바울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곳 보디올에서 7일 동안이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백부장의 이러한 배려는 바울이 폭풍 속에서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디올에서 7일 머문 후 바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맞이 하기 위해 로마 시로부터 50-60km 떨어진 압비오 광장(Forum of Appius)과 ‘세개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트리온 타베르논(Tres Tabernae)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로마의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바울이 멜리데 섬에 도착한 것이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힘드시지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템플이라는 감독이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해서 당당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한 청년이 와서 따져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되는 우연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히 생기고 안하면 우연히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한 것이라네.”

 

그 말씀으로 인해 그 집회에 큰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고백한 바울의 믿음을 설명하여봅시다

 

미항에서 뵈닉스로 가던 도중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바울 일행은 광풍 속에서 바울의 예견대로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한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곳이 멜리데 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멜리데 섬은 오늘날 ‘말타(Malta)’라고 불리우는 섬으로 시실리 남쪽으로 약 98km 떨어진 곳이며 전체 길이가 약 29km 너비가 15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겨울을 좀 편안하게 보내려고 뵈닉스로 가려고 했다가 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뵈닉스보다 로마에 훨씬 가까운 곳에 도착해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바울 일행이 멜레데에 간 것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평범한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광풍에 휩싸여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배가 파선되고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멜리데 섬까지 표류되어 온 것, 생각해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멜리데 섬은 바울도 그렇지만,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 누구도 그 섬이 멜리데 섬인지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와 본적이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우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 믿음없는 사람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왔다는 것이 우연일 수 없습니다. 요즈음도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되거나, 난파되는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어떤 내용이 보도됩니까? 몇 명 죽고, 몇 명 실종되었다는 소식 아닙니까? 시체 찾지 못했으니 실종이지 실제는 죽은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즈음 배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태풍만나면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배가 깨어지고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한 사람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배가 성능이 좋아서 그리되었습니까? 항해 기술이 발달되고 장비가 좋아서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고백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일까요?

 

첫째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의 능력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다른 증인들을 예비해 두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무려 275명의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는 가운데, 로마로 오는 도중 이러 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또 다시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275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살려 주셨어요. 폭풍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셨어요.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바울의 증거보다 죽음에서 살아난 275명의 증거가 더 위력적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섭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뵈닉스에 바울이 무사히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잘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하나님은 바울에게 지혜를 주셔서 뵈닉스로 가는 도중에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뵈닉스로 가려했습니다. 결국, 뵈닉스로 가는 도중 광풍을 만난 것 역시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하던 사람들, 철저히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만을 의지하던 사람들의 고집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바울 한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뵈닉스로 무사히 가게 했다고 칩시다. 그랬다면 백부장, 선장, 선원들이 ‘와 역시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아마도 ‘역시 우리의 항해술은 뛰어나’하며 자화자찬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유흥도시 뵈닉스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온갖 쾌락을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뵈닉스에서 무사히 3개월을 보내고 로마로 갔을 때,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 누가 바울의 고백과 증거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만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뵈닉스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광풍의 고난도 주셨지만 은혜도 주셨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뵈닉스에서 3개월 보내고 그 다음 봄에 로마로 출발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가면 로마에 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야만 했던 길을 광풍 때문에 떠 밀려오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멜리데 섬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됩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섬 사람들의 입장에서 처음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생각 했겠습니까? 많은 수가 죄수 차림이었을 것이고, 난파되어 간신히 살아 육지에 올라온 사람들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섬 사람들로서는 대하기가 편안해 보였겠습니까? 아니면 위협적으로 보였겠습니까? 당연히 위협적으로 보였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줍니다.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영접해 줬어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 아닙니까?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뱀이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까? 독사에 물렸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지 않습니까? 유라굴로 광풍과 모래톱에 걸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섭리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욥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인생이 고달프십니까? 순간 순간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걱정되어 불안하십니까? ‘인생은 고난이다’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세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여러분을 더 잘 아십니다. 내가 가는 길 – 나는 어두워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당신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내 삶 속에 지금 찾아와 주시옵소서. 제가 미쳐 생각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만져주시고 다스려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 주님 뜻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역경 가운데 주님의 섭리하심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간구 속에 주님 만나는 삶이되어야 하겠습니다.

 

2. 멜리데 섬에서 몰려든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바울을 신(神)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멜리데 섬의 사람들 중 제일 높은 사람-보블리오가 있었습니다. 이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동안 친절하게 돌보아 줍니다. 7-8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7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그런데 바울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한 보블리오의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 즉 말라리아와 심한 설사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요즈음에도 말라리아와 이질은 그리 쉽게 치료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료 기술과 약이 허술했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섭리였습니까? 보블리오가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바울 일행 가운데 의사 누가가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보블리오 부친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매 병이 낫다’고만 했지만 의사인 누가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집안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가족들 중에 괜히 낯선 사람들을 집안에 들여 놓아 부친이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렸다고 바울 일행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섬에 사는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9절을 봅니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주자 이 소문이 모든 섬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 왔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베풀기 시작하니까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역사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왜 섬 사람들이 바울에게 몰려왔습니까? 바울에게서 얻을 것이 있었어요. 먹을 것이 있었어요. 은혜가 있었어요. 기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올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일상 생활을 보세요. 무슨 모임이 잘 됩니까? 모여서 일단 먹는 모임이 잘됩니다. 먹으면 모임이 잘 돼요. 왜? 먹어야 사니까. 먹는 것 속에 나눔이 있어요. 먹는 것 나눌 때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흥하는 교회가 왜 부흥합니까? 나눠 먹기 때문이지요. 육의 양식도 자주 나눠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도 풍부해야 합니다. ‘밀알 교회만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다 육의 양식도 풍성하고 영의 양식도 넘쳐 흐른다’하면 모여 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간에 모이면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고, 나눔이 있고, 서로를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저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 밀알 교회는 성도들간에 육적인 양식의 나눔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나눔도 풍성해 지시기 바랍니다.

 

3. 로마에 도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바울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습니까?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의 겨울을 보낸 바울과 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릴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바울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입은 멜리데 섬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그 섬을 떠나려고 하자 감사한 마음으로 후하게 대접하고 또 로마까지 가는 길에 배에서 필요한 것들을 실어줍니다. 바울 일행은 폭풍 가운데 장사할 밑천인 밀까지 다 버리고 몸만 남았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들은 멜리데 섬사람들이 채워 줍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합니다.

 

바울이 어떤 신분으로 로마에 갔습니까? 죄수의 신분으로,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모습을 보니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병자도 고치고, 친구도 만나고, 로마에 와서는 형제들의 환대도 받고,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울의 삶을 보노라면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습니다. 움츠려들지 않았어요. 기죽지 않았어요. 오히려 담대해 집니다. 15절 말씀을 봅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만일 바울의 삶에 믿음이 빠진 평범한 삶이었다면 바울은 지금까지 버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수년동안 고생했고, 풍랑에서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맞으면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나타난 바울을 보세요. 더욱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내가 신앙생활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그런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고백이 매일 매일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말하면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받은 은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고난도 있고, 슬픔도 있고, 역경도 있고, 온갖 어려움이 쌓여 있어도,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고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증거입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그렇게 가려고 했던 이유가 복음 증거 아니었습니까?

은혜 받았습니까? 전합시다. 전합시다. 바울처럼 복음 전하게 위해 공부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일하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전도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로 간 것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멜리데 섬으로 간 것, 그리고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세요. 사는 목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돈 버는 것, 명예 얻는 것, 권력 얻는 것 –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것 – 은혜 속에 아름답게 사는 것 자체가 전도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