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회 공과 2013년 8월 30일

“풍랑으로 배가 깨어지다”
사도행전27장27절~44절

망망 지중해 해상에 276명을 태운 선박 한척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배안엔 로마로 호송되는 죄인들과 호송군인들 그리고 상인들까지 가득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배가 광풍을 만나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광풍은 대작하고(14절), 풍랑은 극심하여(18절),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는 절박한 지경이었습니다(20절). 그야말로 생과 사의 씨름, 대자연과 인간의 싸움이 전개된 것입니다. 싸움은 처절했습니다. 풍랑은 인간의 무기인 화물과 선박 기구들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대자연과 이상 더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장기화되었습니다. 276명은 죽음의 계곡을 여러 차례 내려갔었을 뿐 아니라, 공포와 전율에 떨기를 14일간이나 계속했습니다. 이같이 처절한 생지옥 같은 고난 중에 지위 명예 부귀영화 같은 세상적인 것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가치도 효험도 없었습니다. 다만 현재 목숨이 일엽편주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침몰 익사되지 아니하고 구사일생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살아남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1. 죽음의 질곡 속에서 사도바울이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때 한 조각의 마른 떡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제창한 히브리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그에게 감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떡 한 조각이란 그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한 조각의 떡을 들고 하나님께 축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축사”란 몇 가지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개정과 개역개정판은 “축사”라고 번역을 했고, 현대역과 공동번역은 “감사기도”로 번역했고, 표준역과 새 번역은 “감사”로 번역했습니다. 외국번역의 경우 독일역, Living Bible, KJV, 일본 역은 한결같이 “감사”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축사란 감사 또는 감사기도입니다. 바울은 떡 한 조각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린 것이지요. 그것도 한치 앞 생명을 예측할 수 없는 풍랑 속에서 말입니다. 일반적인 감사란 부족한 것이 넉넉해졌을 때, 약한 것이 강해졌을 때, 잃은 것을 찾은 후에 하는 법인데 오늘 말씀18절 “그들의 재산인 화물을 다 잃은 후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싸 가지고 나온 모든 짐을 남김없이 전부 잃은 후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빵 한 조각 외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19절, 그들 구원의 방편인 선박 기구를 잃은 후에 감사했습니다. 선박을 움직이는 기구란 구원의 방편입니다. 구사일생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상실했다는 것은 살 수 있는 여망을 다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방편을 잃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감사! 높은 차원의 신앙인만이 아는 멋이지요. 시련속에서의 감사! 이것은 감사의 조건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참된 감사란 잃었느냐 얻었느냐 하는 조건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감사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라도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유목민들이 살았습니다. 양을 치면서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아 살아온 유목민족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모여 살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한번은 양들이 샘물을 마시러 갔다가 그 샘에서 나오는 걸쭉한 물을 마시고는 양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우디 아라비아에 사는 유목민들은 ‘이 사막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하나 둘 마을을 다 떠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행크 다니엘이란 사람은 도대체 양들이 먹고 죽는 걸쭉한 물이 무엇이냐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그것은 석유의 원료입니다. 원유였습니다. 사람들은 양들이 다 죽어가서 이제는 절망이요 살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원유라고 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행크 다니엘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절망된 일이 있습니까? 좌절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 가실 때에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을 준비하셨다가 우리에게 주시고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입니다. 하나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은 다른 한 문을 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아! 이분이 메시야였구나. 풍랑도 잔잔케 하고 바람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났습니다.

2. 바울은 어떤 고난 가운데 감사했는가?

20절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절망적인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23절 14일간이나 먹을 수 없을 만큼 고난이 극심한 중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욥기의 서두 1,2장을 보면 욥이 일시에 그의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고 열명의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몸은 나병 같은 악창에 걸려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긁으며 고생하는 인간 최악의 재난에 시달리는 참상이 보입니다. 심지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욕을 합니다. 또 평소에 그를 따르고 존경하던 친구들까지도 네가 평소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천벌을 받느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만약 욥이 현세적인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를 학대하여 목이라도 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오매 하나님은 거두어 가실 권세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고 얼마든지 더 주시기도 하실 수 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코로 숨쉬고 사는 이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 고난 중에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숨을 잃지 아니한 때문입니다. 화물은 다 잃었습니다. 선박 기구도 전부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도 훨씬 귀한 목숨은 잃지 아니했습니다. 어느 것이 귀합니까? 재물인가요? 목숨인가요?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잃지 아니한 것이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바로 구원 얻은 생명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조각의 떡이나마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14일간 먹지 못했던 처지에서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의 이유인 것입니다. 비록 떡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복이라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늘 불행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른 친구는 늘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늘 불행이는 “부모 복도 없고, 아내 복도 없고, 직장 복도 없고, 돈 복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늘 행복이를 찾아갔습니다. 가보니 그에게 늙고 못 배운 부모가 있고, 이쁘지 않은 아내가 있고, 직장도 평범했고, 집은 형편없이 작았습니다.
“행복할꺼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가?”고 늘 불행이가 물었습니다. 늘 행복이는 그 친구를 데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수술대 앞에서 초조해 하는 사람들, 병실에 누워 앓고 있는 환자들, 링겔을 꽂은 채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영안실에서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늘 행복이가 물었습니다. “보라 남들에게 없는 건강이 있고, 날 걱정해 주는 가족이 있고, 작지만 내 집이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는가?” 이 말에 늘 불행한 이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불행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장애인을 지켜보며 내 손 발을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손발이 있음을 감사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감사하고, 굶지 않을 만큼의 쌀과 입이 있으니 감사하고, 자유스런 내 나라가 있으니 감사하고, 오늘도 맥박이 뛰고 있음을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감사했습니다.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교우들이 내 곁에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더 충성하지 못해 죄송했고 더 사랑하지 못해 송구했습니다.

3. 감사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옵니까?

1.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배에 동승한 276명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끝난 다음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아무런 기구도 없는 배가 멀리데라는 섬에 밀려갔습니다. 거기서 토인의 환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가 구원을 초래한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는 기적을 초래합니다.(마14:9) 유대 광야에서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들고 하나님께 축사하니 5병2어가 5천명이 먹고 12바구니 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2. 감사는 생의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그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가정에서 서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아내가 되고 나의 남편이 됩니다. 살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할 때 나의 조국이 됩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사는 의미가 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3. 감사는 삶의 변화를 가져 다 줍니다.

①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감사의 생활은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면을 보고 또 좋은 점 보다는 나쁜 점을 먼저 생각하기에 창조적일 수가 없고 발전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원망과 불평이 도사리고 오해와 시기, 견고한 진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되면 은혜가 충만하여 성령이 지배하는 삶이 가능해 집니다.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대인 관계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부정적인 때는 근심 걱정이 가실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때는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가 넘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다른 복 이전에 감사하는 나 자신을 바꾸어 줍니다. 존재 자체를 감사로 하게 해 줍니다.

② 감사에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 붙잡혀 심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에 옥터가 흔들리고 쇠고랑이 끊어지고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어떤 환경에도 감사할 때에 모든 악조건의 환경이 변하여 축복의 환경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쇠고랑은 풀어지고 간수장이 오히려 무릎을 꿇고 사도 바울의 복음의 사슬에 얽히고 말았습니다. 우리 들 중에는 사면이 꽉 막힌 환경에서 고민하고 낙심 될 때를 경험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진심으로 감사하고 진정으로 찬송합시다. 악조건이 변하여 호조건이 될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풍성한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이 있는 곳에 온전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의 조건(복)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며, 사랑을 심으면 행복을 거두고 감사를 심으면 복을 거둔다는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 시부터 세우신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힘껏 감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조건이 더 많이 생기는 복의 원리를 믿어야 합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실 것”이라고 매튜 헨리가 말했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감사하는 자에게는 복” 이 됩니다. 믿음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영생을 얻습니다. 감사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복을 얻습니다. 헌신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능력을 얻습니다. 충성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건강을 얻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영육 간에 건강이 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들의 마음을 좁히고, 감사와 찬송은 우리들의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성도가 복을 받는 직통로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사합시다. 뒤죽박죽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