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회 공과 2013년 8월 23일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사도행전27장1절~26절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벌써 풍랑 속에서 죽음과 싸워온 지도 14일이 되었습니다. 미항을 출발해 뵈닉스로 가던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폭풍에 밀려 미항에서 840km 떨어진 멜리데 섬 해안까지 휩쓸려 갔습니다. 멜리데 섬 해안에 이르자 그들은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들은 배의 뒷꼬리 부분인 고물에서 닻을 내려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한 후,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면서 두려움은 더해갔고 이를 이기지 못한 몇몇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구명선(거루)을 내려 도망가려 했습니다. 바울이 이를 수상히 여겨 백부장과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저지케 했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은 도망하려는 선원들은 막았지만 구명선까지 끊어버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먹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날 동안 제대로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있는 힘을 다해 이 위기를 빠져 나가려면 먹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자, 바울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풍랑에서도 재산이 될까 해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밀까지 버리게 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육지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킷줄을 늦추어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해 해안을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래톱에 걸려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죄수들과 선원들은 아우성을 쳤고 죄수들이 도망갈 것을 두려워했던 군사들은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했지만, 백부장이 바울을 구하려 하여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부장은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을 치게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에 있던 물건들을 의지해서 육지에 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바울이 예언했던 대로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모두 무사히 상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공부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얻어야 할 영적 교훈과 지혜는 바울의 행동 속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1. 광풍과 풍랑 속에서 바울은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⑴ 도망가려는 사공(27-30)
먼저 27절로 30절까지의 말씀을 봅니다.

“27열 나흘째 되는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 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14일 동안 풍랑 가운데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육감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반의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닻을 내리면서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모두들 노력하고 있는 사이에 몇몇 선원들이 구명선을 내려 자신들만 도망가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들이 도망가려고 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동안 목숨을 앗아갈 것 같았던 폭풍 속에서 속히 빠져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온몸으로 겪던 불안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선원들입니다. 배를 안전하게 운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살고자해서 도망한다면 배에 남은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참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참 모습은 언제 드러나는지 아십니까? 평탄할 때는 모두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에는 실체가 드러납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위기의 때에는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주위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모아 해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거짓 지도자는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자신의 것을 먼저 챙깁니다. 가족들을 먼저 피신시킵니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만 독려합니다. 진실은 밝혀집니다. 시간가면 압니다. 위기가 극복되겠습니까?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선원이 도망가면 풍랑이 멎는다 해도 배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더구나 모두 다 버려서 제 기능도 할 수가 없는 배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속회지도자로서, 교사로서, 성도로서 교회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까? 강단에서 소리치고, 간곡하게 광고해도 멀리서 관망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 하겠지. 전도는 열심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몇 번 광고하다가 지치면 말겠지. 열심 없는 다른 사람이 청소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누군가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밀알교회 모든 성도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합니다.” “예, 내가 하겠습니다” 도망가려는 선원들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⑵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지시하는 바울(31-32)

미항에서 출항할 때까지는 이 배의 모든 것은 백부장의 지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대로 폭풍이 심해지고 배도 사람들도 모두 위태로워지자 백부장과 선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31-32절을 봅니다.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무엇이 보입니까? 바울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이 보입니까?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명령합니다. 이제 바울은 속된 말로 실세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난세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바울이 모든 사람을 지휘하는 진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지도자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을 헤쳐 나갈 힘이 없는 백부장에게 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가 되어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만 살려고 도망치려는 선원들을 백부장과 군사들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위기의 때에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⑶ 선원도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했던 사람들을 발견한 후 그들을 막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은 바다와 풍랑에 대한 지식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처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고, 이제 날이 새면 육지에 상륙해야 하는데, 선원들이 없다면 상륙하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풍랑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분명 바울 일행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역할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분명 위기의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원처럼 자신만 도망가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상황을 이겨나가는데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위기의 순간에도 사랑을 가진 지도자 바울의 모습은?

위기의 순간에 바울이 대처하는 모습을 보세요. 어떻습니까? 33-3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육인 이러라.”

⑴ 먼저 바울은 먹으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먹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풍랑과 싸웠기에 그들은 지쳐있었고 거기다가 제대로 된 음식은 먹어보지도 못했으니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지쳐 있기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운 차리고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점을 미리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육지로 상륙하는 과정에서 헤엄을 쳐야 하는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되었습니까? 41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그렇습니다. 모래톱에 걸렸습니다. 배 앞부분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게 되었고 배 뒤편은 높은 파도에 부서져 버렸습니다. 위기입니다. 구명선도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헤엄을 치거나 널빤지를 붙잡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사전 조치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힘이 없어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먹고 기운 차리게 함으로 헤쳐 나갈 힘을 갖게 했습니다.

⑵ 안심시켜주는 영적지도자.

바울의 자애로운 모습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34절을 함께 봅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사실, 바울을 제외한 다른 선원들 머리 속에는 이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하면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까에 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터에 바울이 먹을 것을 권해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한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은 자가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살고 싶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리고 걱정마라. 너희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평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평온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먼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힘들어하는 사람을 다그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위로하고 안심시켜 힘을 얻도록 해야 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때로 우리가 이런 것 잊을 때가 많지요. 힘들어하는 사람, 낙심해 있는 사람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지피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할 수 있으면 바울과 같이 이웃에게 참된 평안을 갖게 해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⑶ 감사를 잊지 않는 바울

바울은 위급한 순간에도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35절입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바울은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서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있어서는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먹는 것을 앞에 두고 여유 있게 감사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할 때 일수록 감사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38절 이후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모습을 설명하여 봅시다.

⑴ 밀까지 버리라.

먹을 것을 다 먹게 한 바울은 이제 배를 더 가볍게 하기 위해 밀을 버리도록 합니다. 사실 이 밀은 로마에 가서 장사할 밑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하물(18절), 배의 기구들(19절)을 버리고 닻까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밀은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 정도로 밀은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이 순간 밀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숨 건지기 위해 모든 소유욕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 목숨 죽으면 내가 가졌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헛된 소유욕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지 않습니까? “왜 저럴까? 저것을 진작 포기했더라면 인생이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헛된 욕심은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욕심 버리세요. 어려울수록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욕심 버리세요. 세상 자리에 대한 욕심 버리세요. 물질 욕심 버리세요. 인생이 훨씬 밝아지고 편안해 집니다.

⑵ 마지막 기회

밀을 버림으로써 배는 경사진 해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원들은 닻을 끊어버리고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상륙을 시도합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닻까지 끊어버렸습니다. 닻을 끊는다는 것은 때로는 배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되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결심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향후 2-3년이 저나 여러분, 우리 밀알 교회에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여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새 역사를 힘차게 열어갑시다. 열심히 합시다.

⑶ 바울 때문에 살게 된 죄수들

닻을 끊고 킷 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상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래톱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자 죄수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도망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군사들은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비상시에는 법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수를 죽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까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군사들에게 죄수를 죽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려고 했을까요? 위기를 극복하는 바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겠지요. 쉽게 죽여서는 안 될 인물임을 깨달았겠지요. 바울의 신앙이 백부장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 한 사람만 살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다른 죄수들까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대로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모두 온전한 모습으로 상륙합니다. 275명이 모두 다 무사하게 살게 된 큰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로마에 가서 죽음의 위기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거자-전도자가 되라고. 오죽 잘 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 만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셋만 살아서 로마에 갔다면 항해 도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누가 믿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방인들이 믿겠습니까?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바울은 감옥생활을 하면서 생각지 못한 처지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너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 거하게 될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이 있었기에 그래도 바울은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가긴 했지만 그러나 패배자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했습니까?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