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8월2일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다

사도행전25장13절~27절

 

베스도 총독은 그 지역의 사정에 밝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고소 사건을 설명하면서 자문을 구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아주 상세하게 바울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말씀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는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매우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은 그의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바울이 닮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에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아그립바 왕이 로마로부터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에게 인사차 방문을 했습니다.

= 베스도 총독은 그 지역의 사정에 밝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고소 사건을 설명하면서 자문을 구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바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스도의 속셈인 즉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데 대한 아그립바 왕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아주 상세하게 바울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소개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즉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매우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바울의 고난3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1, 스스로 자처한 고난.

 

11절에 보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증언 할 때에 그는 말하기를 <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 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살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나이다 > 라고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증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 죽기를 사양치 않는다. > 라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죽음을 사양치 않으므로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 사람입니다. 만일 바울 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만을 원했다면 바울은 지금 이 고난의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당한 모든 고난은 고난을 보고도 피하거나 도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스스로 고난을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행20:22)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기를 <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못하노라 > 했고 그는 또 이어서 (23절)에서 말하기를 <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니라 > 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같이 억지로나 불가항력적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자처하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 그는 한 번도 죽음이나 고난이 두려워서 가던 길을 중지하거나 피하여 도망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나 고난을 각오한 자 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닮은 점이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자처 하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것은 피할 길이없거나 힘이 없어서 불가항력적으로 당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고난을 피하거나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스스로 자처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철역에서 자살을 하려고 기차가 막 들어 오고 있는데 철길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때 전철을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어떤 학생이 뛰어들어 그 할아버지를 철로 밖으로 끌어내는 바람에 큰 변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용감하고 훌륭한 학생이라고 방송들이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이렇게 강퍅하고 살기가 어려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많아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 예수님과 같이, 바울과 같이, 또 용감했던 학생과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을 자처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거나 닮아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주를 위하여, 또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즉 어렵고 힘든 일을 보면 피하여 지나가거나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므로 고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를 닮은 바울의 고난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구원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

 

19절에 보면 베스도가 아그립 왕에게 바울이 고소당한 죄목을 설명할 때에 그는 <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 고 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바울이 고소를 당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고난이 예수님을 어떻게 닮았습니까 ?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습니다. 바울의 평생에 고난을 당하고 고생한 것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받은 고난 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야욕 때문에 받은 고난입니까 ? 아니면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고 싶어서 잘난 척 하다가 받은 고난입니까 ? 예수님께서 받은 고난은 바울의 고난과 같이 자기 백성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받으신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난이 바로 이것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옛날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이야기들 중에는 옛날에 고생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 고생이 너무 너무 컸다는 표현으로는 내가 책을 써도 열권을 쓰고 말을 하라면 열 밤을 다 새워도 다하지 못한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정말 우리 조상님들은 고생을 참 많이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사실은 고난의 모양이 달라서 그렇지 우리가 사는 세상도 고난이 없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많은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고난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나 바울이 당한 고난은 우리조상들이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지만 주님과 바울이 당한 고난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라는 점에 바울은 예수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이나 삶을 원하시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 마실까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만되지 마시고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도 밤을 새워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며 고심 하므로 고난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근심을 신령한 근심이라고 했으며 이런 신령한 고난과 근심을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근심이요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의 고난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

 

3. 죄 없이 당하는 고난.

 

25절 말씀을 보면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을 설명하기를 <나는 살피 건데 죽일 죄를 범한일이 없더이다.> 라고 했고, 또 (25:8)에서는 바울이 스스로 증거 하기를 < 바울의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 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 하였노라 > 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고난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죄 없이 당하는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죄가 없는 증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7절)에 보면 베스도는 말하기를 <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 고 했습니다. 눅23:4에 보면 빌라도 법정에 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고소할 때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셔서 죄 있는 자처럼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이 바로 이 예수님의 고난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벧전2:20에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향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고 말씀 했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은 어떤 고난이라 생각 하십니까 ? 바울이나 예수님과 같이 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까 ? 아니면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이나 혹은 스스로 실수를 해서 당하는 고난입니까 ? 만일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닮은 죄 없이 당하는 고난이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고난이며 주님의 칭찬과 위로가있는 고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사실과 다르거나 전혀 근거 없는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 억울하고 화가 나서 한 길씩 뛰거나 생사를 걸고 사실을 밝히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죄 없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르다우니라 > 그리고 그 고난은 (주님을 닮은 고난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2:24)에서 말하기를 < 내가 이제 너희를 인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죄 없이 고난을 당할 때에 억울함으로 분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이 당하는 고난은 주님을 닮은 고난이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이 어떤 고난이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자처하는 고난,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 그리고 죄 없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무슨 고난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를 닮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모쪼록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닮는 고난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