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7월26일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사도행전 25장 1절 ∼ 12절

오늘 말씀은 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과정입니다. 먼저, 총독 베스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베스도는 총독 벨릭스의 후임으로 AD 58-60년경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 사망하기까지 총독으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 베스도 총독은 의롭고, 정직하였으며, 좋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이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이 재판받는 장면입니다.

1.바울을 죽이고자하는 유대인들과 베스도의 재판을 살펴봅시다.

1절 말씀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베스도는 총독으로 부임한지 삼 일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삼일 만에 갔다고 하지만, 사실 베스도 신임 총독이 예루살렘 방문을 매우 서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만을 쉬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베스도 총독이 왜 이리 급히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관할 구역을 탐방함으로써 지역의 유지들과 친분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루살렘이란 곳의 중요성이 베스도 총독으로 하여금 삼 일 만에 예루살렘을 찾게 한 주된 이유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의 수도였습니다. 더욱이 종교적인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정치적으론 상당히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서는 결코 예루살렘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에 방문하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총독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총독이 오니까 당연히 지역의 유지들로써 마중을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바울을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베스도는 지금 신임 총독으로 예루살렘으로 방문하여 그곳의 유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민족의 유력자들을 만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 민족의 유력자들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해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 참으로 끈질기고 지독하지 않습니까? 바울을 죽이려는 열정이 보통이 아닙니다.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지도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찌 보면 바울에 대한 악한 심정도 수그러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이 무엇입니까?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는”

한 마디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까? 가이샤라까지 가는 길이 멀어서였습니까? 아니지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자객을 매복시켜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하자는 요청을 받은 베스도 총독은 두 가지 이유는 말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니 도주할 염려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이제 곧 내가 가이사랴로 떠날 텐데, 굳이 바울을 불러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써는 바울이 위험한 죄인도 아닐뿐더러, 바울이 직접 로마 시민권을 내세우며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기 때문에 산헤드린 의회에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어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정 고소하려고 한다면, 같이 가이사랴로 가서 고소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에 대한 재판은 베스도 총독의 제안대로 가이사랴에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약 10일 정도 머무른 후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리고 베스도 총독은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튿날 바울을 고소하고자 했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오게 하여 재판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을 죽이겠다는 오직 한 가지 신념으로 이번에는 더둘로와 같이 유능한 변사를 대동하지 않고 직접 많은 사람들이 손수 와서 송사에 앞장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에게 위협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바울의 죄에 대해서 고소하고 나서면 바울이 위축될 것이고 베스도 총독은 분명히 자신들을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분명 바울이 죄인임을 말하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재판은 시작되었고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이 고소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바울의 죄목에 대해서 분명한 증거를 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2년이나 학수고대했지만, 여전히 바울의 죄목을 입증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된 내용을 가지고 바울이 유죄임을 증명하려고 하니 그것이 되겠습니까? 2년이나 시간이 흘렀으니 증인을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모함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니 거짓이 거짓을 낳을 수 밖예요.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가 끝나자, 이번에는 바울이 이에 대해 변론을 시작합니다.

“8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하니”

이것이 바울의 변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에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유대인의 율법도 범한 적도 없고 성전에 이방인과 함께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더욱이 반란을 꾸며 가이사에게 누를 끼친 적도 없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바울로서는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바울은 자신은 로마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가이사의 법정에서 재판받기로 했으니 굳이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재판 역시 판결이 보류되는 것으로 재판을 종결되고 대제사장들과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음모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울에 대한 베스도의 재판이고 두 번째는 바울의 형편입니다.

1. 베스도의 재판

우리는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받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재판 자체에 대해서 두 가지 면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판의 긍정적인 모습이며, 두 번째는 재판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⑴ 긍정적인 면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재판은 사실상 바울에게는 매우 불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스도 총독은 새로 부임해 온 총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유대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벨릭스 총독도 중앙으로 소환된 이유가 그의 폭정으로 인해 유대 민족 지도자들과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제 잘못하면 베스도 자신 역시 그의 총독 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단 관할 지역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중앙 정부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와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베스도가 쉽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이점은 우리가 베스도 총독에게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 대한 재판을 가이사랴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은 그가 일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즉, 베스도는 만약 이 재판이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것이라면 당연히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가이사랴의 재판장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결정으로 인해 일단 바울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 지도자들이 매복시켜 놓은 자객들에 의해 분명 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것이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⑵ 부정적인 면

그러나 베스도의 재판에 한 가지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아마 이전 총독 벨릭스로부터 바울에 관련된 이야기도 모두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설사 베스도 총독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재판 과정 중 송사를 하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 그 어느 누구하나 바울이 죄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죄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 모두가 거짓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재판관으로서는 석방시켜야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왜 바울을 석방하는 것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습니까?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유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베스도 총독은 신임 총독으로서 자신이 유대 민족 지도자들에게 분명 환심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유대인들의 요청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의 이런 제의에는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베스도 총독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정치가로써 백성들로부터 환심을 얻어내기 위해 진실마저 외면하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 많습니다. 지도자로써 환심을 얻기에만 급급하지 진실을 지키려는 마음은 약한 지도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 민심에만 관심이 있지, 정말로 지킬 것은 지키고 말할 것은 말해야 하는 사람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조금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반면, 올곧게 목적을 이루고자 진실 된 모습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은 존경은 하지만 그리 사랑 받지 못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거부감이 생깁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거짓의 담을 쌓아갑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진실을 말하고 진실 된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더욱 진실 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사회 명분이 진실보다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병폐입니다. 명분도 중요하겠지만 진실 앞에서 명분만을 강조하는 것은 작게는 개인을 망치는 것이며 크게는 한 나라의 미래가지 망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명분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 위에 세워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베스도 총독처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명분이 여러분의 한계를 긋고 있습니까? 한계를 뛰어넘는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바울의 형편

베스도 총독이 새로 부임하여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총독 벨릭스에 비하여 사실 훨씬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베스도 총독은 비교적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 결과 바울은 이번에도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생활했는데 그래서 마음과 몸이 지쳐있는데, 이제는 현명한 총독이 와서 풀려날 것만 같은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로써는 충분히 원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언제 석방되어 로마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감옥에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만 합니까?”라며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무엇입니까? 사실, 바울은 상당히 지쳐있었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은 바울로 하여금 몹시 심신을 지치게 했습니다. 때로는 가진 모욕을 당했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번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도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변화 받기 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쳐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복이었습니다. 바울의 열정을 아셨던 하나님이 베푸신 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만히 두면 제 스스로 지쳐 쓰러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이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시간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론 바울이 지금 당장 석방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년 동안이나 바울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시 한 번 송사를 했던 사람들이 바울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 두겠습니까? 아마 자객을 매복시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죽이려고 온갖 힘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나가서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에도 가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복음도 증거 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닙니까?

바울에 대한 재판이 석방으로 판결되지 않은 것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만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역경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도 합니다. 고난의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에이! 난 정말 운도 없어. 매일같이 힘든 일만 생겨”하며 절망하고 낙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닥쳐오는 고난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여행 할 때 스케줄에 맞춰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진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때로 스케줄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즐길 줄 압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할 필요 없습니다. 왜요? 주님께서 모든 고난과 역경까지 이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 아닙니까? 믿음이 고난을 찬란한 복으로 변화시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하십니까?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했던 그들이 기억 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했던 그들의 믿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고난을 이기고 승리의 삶으로 역전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가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짧은 지혜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3. 오늘공부를 통하여 어떻게 결단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2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재판하자는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였던 베스도 총독 역시 정치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다만 유대 민족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시선이 중요합니까? 어느 곳에 시선을 맞춰 살아야 합니까? 베스도는 하나님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사람의 시선을 따르는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는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고 나의 하나님 그분의 뵐 땐 나는 만족 하였네” 찬양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세상의 시선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 속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베스도처럼 말입니다. 재판관이라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무죄라면 풀어주었어야죠! 바울의 신상에 위협이 있다면 보호조치를 내려 석방했어야죠!

역시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없는 죄까지 뒤집어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시선만을 중시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풍조 때문 아닙니까?

베스도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시선에 사로잡히지 않고 민심을 얻으려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바울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 만을 보았다면 하나님은 기뻐 하셨을 것입니다.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이 진실만을 말하는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의와 사랑의 진실만을 붙잡고 살아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