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7월19일

바울이 감옥에 갇혀 지내다.

사도행전24장24절~23절

바울은 사도행전 16장에서 간수장에게 설교 할 때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고 온 가족과 더불어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벨릭스 앞에서 설교할 때는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하여 말했습니다.”이것은 바울이 벨릭스의 사생활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마음에 찔리는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를 연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심판에 대하여 두려울 때, 바로 즉시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벨릭스는 많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을 많이 죽인 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무절제한 사생활과 결혼 생활의 허물이 있습니다. 그는 즉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회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회개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사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같은 마음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가 로렌스 박사가 소아마비 병을 고쳤다는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를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만나라도 보았으면 했지만 자신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라서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비까지 내리는 날 심난해 있는 이 소년의 집에 웬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비를 피해가려고 들려 잠시 쉬기를 원했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냉대하며 거절했습니다. 비오는 날 산책 나왔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토록 만나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했던 로렌스 박사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소년의 어머니는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습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회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문제는 그 기회를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6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다른 번역에는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살리십시오.”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주어진 기회’란,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고, 자신의 현실을 기회로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무가 고요하기를 원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樹欲靜而風不止) 아들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恣慾養而親不待)”는 한시(漢詩)도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주어지는 기회를 잘 포착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고부할 말씀을 보면서 벨릭스에게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을 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하든 죽이려고 유대법과 로마법에 정통한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면서까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지만, 그들의 계략은 벨릭스가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일단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벨릭스는 판결을 내리면서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줄 것과 친구 중 아무나 수종을 들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참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입니다. 벨릭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유대이들 편에 서서 바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확한 벨릭스의 의중은 알 수가 없지만 그 이유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에게 호감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벨릭스는 수일 후에 그의 아내 드루실라(Drusilla)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道)를 들었습니다. 도를 들은 벨릭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6절에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침없이 죽였던 총독 벨릭스가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듣고는 두려워했다- 언뜻 상상이 되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벨릭스의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지 있습니다. 이러한 벨릭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안에 선한 본성도 있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아무리 내 삶 속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고 낙심이 될 때도 때로는 그 사람에게도 ‘선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벨릭스가 잔인하고 탐욕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도 선한 모습으로 변할 가능성은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전도하다 보면 ‘야! 저런 사람이 예수 믿을 수 있을까? 저런 사람에게도 구원의 능력이 임할까?’ 이런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과도 만납니다. 이럴 때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아예 전도하려고 하는 마음을 접고싶어 질때가 있습니다. ‘봉변당하지 말고 그만 두자’ 이렇게 결론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힘서 예수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봉변당한다면 영광 아닙니까? 비록 전하기는 내가 하지만, 역사는 성령께서 하십니다. ‘하나님!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사람도 구원해 주셨는데, 주님,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힘써 전해야 하겠습니다.

 

1.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세 가지 도(道)는?

 

“25바울이 의(義)와 절제(節制)와 장차 오는 심판(審判)을 강론(講論)하니”

⑴ 바울이 전하는 예수 믿는 첫 번째 도(道)는 의(義)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의롭다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도 중요하지만, 밖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내적인 문제, 우리 중심의 문제 마음의 자세, 생각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마음, 생각, 사상이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벨릭스 앞에서 이 “의(義)”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잔인한 벨릭스 앞에서 “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용기보다는 벨릭스의 악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벨릭스의 악함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악하다는 것’은 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한 순간에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이 악해지니까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총독 벨릭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문제 아닙니까? 의로워야 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철저한 회개가 일어냐 하는데 오히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없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인데 선하다는 것은 착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임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물질 문제로, 윤리 문제로 세상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⑵ 바울이 두 번째로 증거한 것은 절제(節制)입니다.

절제에 반대되는 것은 방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벨릭스의 아내 유대여자 드루실라가 나옵니다. 드루실라는 아그립바 Ⅰ세의 막내 딸로 15세 때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세미인 드루실라를 본 벨릭스는 그녀에게 반하여 마술사를 매수하여 드루실라를 설득하여 아지주스로부터 그녀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무엘하서 11장에 보면, 다윗도 절제하지 못하여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자기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임신한 밧세바와 우리아를 같이 자게 하려 했으나 그도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충신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여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9:25에서 고백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절제한다는 뜻입니다-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 이로라” 라고 했습니다. 절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삶은 절제하는 삶입니다. 감정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좋게 생각지 않으면 나는 좋게 생각해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절제’라는 것에 참으로 미묘한 것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내가 하는 행동은 절제된 행동이고 같은 행동이라도 다른 사람이 하면 과하다’고 하는 판단의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치스럽다고 하고, 내가 좋은 차타고 다니면 안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남을 판단함에 있어서 자기중심적이면 결코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도 절제해야 합니다. 풍요로운 삶도 절제해야합니다. 말도 절제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⑶ 셋째 바울은 “장차 오는 심판(審判)”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판이 미래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현재의 내 생활, 내 삶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왜 밤새워 열심히 공부합니까? 공부한 것-시험 때면 결판납니다. 열심히 예수 믿는 것 – 심판 때 결판납니다. 심판은 있습니다. 심판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 있기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역경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속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심판이 있기에 예수 믿는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기에 환난가운데 예수를 믿었던 성도들의 의로움이 증거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예수 굳게 붙잡고 이기십시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반드시 의롭게 여겨 당당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의(義)와 절제(節制)와 심판(審判) – 이것은 분명 예수 믿는 도입니다.

 

2.바울의 예수 믿는 도를 들은 벨릭스는 어떠한 반응은?

 

“25……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벨릭스는 바울에게로부터 그의 일생일대에 커다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노예 출신으로서 총독까지 되었지만, 그가 이제까지 얻을 수 없었던 가장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바울의 말을 듣고-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관한 강론을 듣고는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심판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연기함으로써 일생일대의 가장 크고도 위대한 복을 차버리는 결과는 낳게 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벨릭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벨릭스는 세 가지를 연기함으로 후회스러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⑴ 벨릭스는 듣는 것을 연기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자 벨릭스는 ‘시방은 가라’고 말합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듣고 보니 자신의 죄악이 수면 위에 떠오르는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벨릭스는 말합니다. ‘이제 그만해라’, ‘내가 나중에 다시 듣겠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벨릭스 –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 테이프도 이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듣고자 한다면, 어디를 가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 듣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듣는 것, –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앞의 내 인생이 어떻게 될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말씀 듣기를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지금 내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내가 거듭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저녁 예배, 수요예배 등. 말씀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꽉 잡으십시오. 말씀을 사모하여 기대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말씀이 기적이 됩니다. 말씀 들을 때 상한 심령은 치유되고 연약했던 모습이 강건해 집니다. 우리교회 유치부에 가서 말씀 전할 때가 저는 제일 신납니다. 왜냐하면 설교 좀 더 하라고 떼를 쓰니까요 요즈음 어디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겠어요. 종종 중고등부 청년부 어른에게서 “목사님 하나님 말씀 더 듣고 싶어요. 설교 좀 더 오래 하세요” 하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말씀 듣기를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로 미룰 일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⑵ 벨릭스는 회개를 연기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이 전한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온 벨릭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기회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이 기회를 연기함으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회개케 하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때로 말씀을 들으면서 분명 두려움과 떨림, 전율을 느끼면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나를 향한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하거나, ‘난 그 정도는 아니니깐’하며 위안을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회개케 하면 회개하고 주님이 사명을 깨닫게 하시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삶이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벨릭스가 바울의 강론을 듣고 즉각적으로 회개했다면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미루지 말고, 오늘,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더러운 것들, 나만 알고 있는 죄 – 모든 것을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세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고 푼 마음이 생겼을 때, 비록 그 순간에는 감추고 싶더라도 주님 앞에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드러내기만 하면,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용서해주십니다. 분명 주님께서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도를 듣고 벨릭스가 회개했더라면 그가 비록 대제사장 요나단을 죽이고, 드루실라를 아내로 삼았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리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⑶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알면서도 석방을 연기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의 석방을 연기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해서였습니다. 벨릭스는 이미 바울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벨릭스가 돈에 욕심을 갖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벨릭스는 바울이 구제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혹시 사용하고 남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 돈을 욕심낸 것 같습니다. 벨릭스의 마음속에는 ‘바울아!’ 네가 풀려나기 위해서는 나에게 돈을 줘야 한다.’라고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인생을 망칩니다. 물질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있으면 됩니다. 욕심이 넘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 버려야 삽니다.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7이 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또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이 죄 없는 것 알면서도 2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왜냐구요?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인심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 1서 3:11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성도의 삶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육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 당연합니다. 때로 세상은 성도들을 우습게 볼 때도 있습니다. 바보처럼 여길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철저한 신앙인일수록 세상에서는 인심을 잃고 미움 받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대로 이리저리 둥글둥글하게, 적당히 세상 눈치 빠르고 계산 빠르게 사는 삶 보다는 좀 미련하게 보일지언정 진득하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순종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 –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화) 주식회사 신원의 박성철 회장은 교회 장로셨습니다. 신원 에벤에셀 아시지요? 박성철 회장은 이 신원을 자타가 공인하는 믿음의 기업으로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업이었던 신원 역시 97년 경제 위기 때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건설, 부동산까지 진출해 16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던 신원은 빚을 제때 갚지 못해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직원은 3천명에서 9백 명으로 줄이고 13개의 의류 브랜드도 5개로 축소했습니다. 이렇게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직원들과의 마찰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평소 신앙을 강조해왔던 기업문화 덕분이었습니다. 떠나야 하는 직원들도 회사 사정을 이해해 주었고 남아 있는 직원들은 회사를 되살려 이들을 다시 불러와야겠다는 ‘각오(覺寤)’를 다졌습니다. 다행히 해직된 직원들은 대부분 다른 업체에 재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이 – 재취업의 배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진득하게 밀고 나갔던 신앙을 바탕으로 한 회상의 경영 방침이 ‘신원 직원이면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3. 벨릭스 교훈이 나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어떻든 세상이 뭐라 해도 자기 영혼은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에 손해가 되는 것은 다 버리고 끊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도를 들은 벨릭스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말씀 듣기를 연기하고 회개를 연기함으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씀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눈치 보면서 슬슬, 적당히 타협해 가는 신앙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겠습니다.

성경적 용어의 개념을 살펴 회개를 정의한다면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인간이

둘째,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에 의존하여 살아왔던 과거의 사고방식을

셋째, 전파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완전히 의존함에 따라

넷째, 인격의 삶 자체를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돌이켜 복귀시키는 의지적 결심으로

다섯째, 지금까지의 불 신앙적인 사고로 인한 죄악을 미워하고 애통하며 포기하고 떠날 뿐만 아니라

여섯째, 마음의 변화를 받고 생활의 근본적인 태도가 개조됨으로 인생의 목적이나 의도가 바뀌어

일곱째, 옛사람의 상태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여덟째,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선을 기뻐하며 완전히 돌아서 버리는 방향전환으로

아홉째, 진보된 영적 상태의 인간 행위를 의미한다(고후 12:21).

회개는 신자가 한 평생을 두고도 단 한 번뿐인 고로 반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의 회개의 용어를 이해하고 보면 지금까지 교회와 지도자들은 자백해야 할 경우까지를 모두 “회개하라”는 동일한 말로 강조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를 결론한다면 “불신자의 상태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행위이므로 죄인과 관계되어 있으며 성도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주님께 향하는 방향전환이므로 신약 성경이나 구약에서 회개의 대상은 거듭난 상태에 있지 않는 경우이며 거듭나서 구원된 후에는 성도에게 회개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성도는 죄(sins)에 대한 자백이 요청되어 있다(요일 1:9,10). 만일 이외에 적용된다면 일반적 용법으로 육신의 행위의 방향 전환일 뿐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으로서 시작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의 전부가 회개에의 부르심이고, 하나님에의 복귀를 말한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인간 속에 죄의 내재성을 지적하시고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 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마 5:22, 28, 29). 또한 지옥이나 영원한 멸망도 언급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다 (마 10:28, 23:33).

인간에 대한 회개는 요구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의 선물에 다름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은 율법에의 응답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의 응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회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