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7월 5일

바울을 벨릭스 총독 앞에 세우다.

사도행전23장31절~24장9절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행23:33-35)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24:1)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24:2-4)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24:5-6)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24:7-9)

 

1. 바울이 벨릭스 법정에 서게 된 이유는?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로 이송되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우선 바울이 어디 출신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행23:33-35) 당시 로마 제국은 여러 종류의 식민지들이 있었습니다. 황제 관할, 원로원 관할의 영토가 있었고, 직할 식민지도 있었고, 세금만 거둬가는 식민지도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출신 지역을 물은 것은 자기가 직접 취급할 사안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황제 영지이고 수리아 관할이었기 때문에 벨릭스 총독의 관할 지역입니다. 총독은 이 사건을 자신이 다루기로 결정하고, 바울을 헤롯궁에 가두라고 지시합니다. 헤롯궁은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에 건설했던 왕궁으로 당시에는 총독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장소를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했는데(막15:16), 총독관저(the praetorium)란 뜻입니다. 총독 관저는 바로 재판정으로 사용되었고, 대개 이런 건물의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총독부 건물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일종의 혜택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고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관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은지 닷새 후에 재판이 열렸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습니다. 고소자의 대표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공회를 대표하여 몇 명의 장로들과 변호사를 대동했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24:1) 변호사를 데리고 온 것이 특이합니다. 말 잘하는 유대인들이 왜 굳이 변호사를 선임했을까요? 특히 아나니아는 유대 최고 법정인 산혜드린의 의장입니다. 말하자면 법을 다루는 최고의 판사입니다. 그런데 왜 변호사를 선임했을까요? 당시 바울을 심문하는 법정이 로마 법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식의 변론에 밝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법정에 고소하는 이유는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법정이 주력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리적인 공방입니다. 특히 민사 소송의 대부분은 서로 이기기 위해 벌이는 재판입니다. 이런 재판은 정의보다는 이기기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됩니다. 유대인들이 굳이 로마 변호사를 선임한 것은 그 재판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2. 변호사 더둘로는 어떻게 바울을 죄인으로 만들어 갑니까?

바울을 재판하기 위해 선임된 변호사는 더둘로(터툴루스)란 사람입니다. 터툴루스란 이름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더둘로가 유대인을 위해 변론하게 된 것은 그가 유대인 출신으로 로마법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둘로의 변론을 봅시다.

우선 그는 변론의 절반을 재판장에게 아첨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24:2-4)요약하면 이런 얘깁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벨릭스 때문에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선견(provnoia : providence)이 있어 잘 다스렸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유대 사회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유대인들은 항상 벨렉스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아첨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입니다.

벨릭스에 대해서 앞서 말씀드렸지만 벨릭스는 노예에서 돈으로 자유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형이었던 팔라스 역시 안토니아 왕비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벨릭스는 세 명의 부인을 뒀는데, 그 중에 첫째는 안토니와 클레오프트라의 손녀였고, 셋째 부인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 드루실라였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 요세푸스는 다 같이 그를 최악의 총독으로 꼽고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벨릭스를 가리켜, “노예 근성으로 왕권을 휘두른 자”라고 요약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유대인들은 환성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단지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 아첨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이 비겁하고 가소롭습니다.

더둘로는 한 마디 더 아첨을 합니다. 변론을 길게 하여 조금이라도 총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짧게 변론을 하겠으니, 널리 관용하여 들어달라고 합니다. 형편없는 아첨이기는 하지만 당시 변호사로써는 상당히 유능한 발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더둘로의 발언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처세를 위한 어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게 유익하다면 무슨 말이든지 다 합니다. 상대가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입에 발린 말을 합니다. 성경은 아첨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 하나이다”(시5:9)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3)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잠26:28)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잠29:5) 아첨보다는 진실한 말을 합시다. 우리 시대에 정말 듣고 싶은 말은 유창한 말, 유식한 말, 똑똑한 말이 아닙니다. 진실된 말, 진심이 담긴 말, 중심이 실려 있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어법입니다.

 

3.바울에 대하여 변호사 더둘로가 왜곡 시킨 세 가지는?

더둘로가 고발한 바울의 범죄는 세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다 당시 로마 법에 위반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유대인의 종교적인 문제를 어떻게 하든지 로마 법으로 얽어 매려는 억지 논리에 불과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왜곡했습니다.

첫째로, 바울을 천하의 유대인들에게 소요를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고발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24:5) 사회적 소요는 로마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문제였습니다. 벨릭스 자신도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애굽인들의 반란이나, 시카리라고 하는 도적떼를 진압한 경력이 있습니다. 더둘로는 이런 점을 교묘히 엮어서 바울을 사회적 소요를 일으킨 자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단지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누구를 선동하여 유대인을 반대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다는 점을 알렸을 뿐입니다.

한국 사회도 보면 언제부터인가 복음 전도를 교묘하게 막으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전도 활동을 종교 편향이란 이름으로 가로막습니다. 창군 때부터 있었던 군 선교 활동을 비롯해서, 경찰 선교 활동, 학원 선교 활동, 직장 선교 활동 등등.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던 거의 모든 선교 활동이 각종의 명목으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하면서 전도 활동은 종교 갈등이란 명목으로 제한을 합니다.

복음전도를 사회적 문제로 삼으려는 세력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 해서 복음 전도를 막아왔습니다. 북한 내에는 명목상 교회, 전시용 교회는 있어도 진정한 교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위에 김일성이 있는 것이 북한입니다. 지금도 김일성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견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북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한 요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휘젓고 다니면서 모든 기사마다 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비리를 고발하는 척 하면서 각종의 루머와 악평을 일삼습니다. 반교회적인 사회적 여론을 조성합니다. 이런 작용을 한 결과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나쁜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에서 교회는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육, 의료, 문화, 한글 보존, 여성의 지위 향상, 사회 복지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교육과, 사회 복지에서 기독교가 담당하는 몫은 대단합니다. 태안반도에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 다녀간 사람의 절반이 교회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악평하여 모든 교회가 쓸모없는 존재인양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복음 전도에 대한 끝없는 왜곡의 결과입니다.

둘째로, 복음에 대한 왜곡입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24:5) 이단(ai{resi”)이란 말은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 같은 종파(sect), 혹은 학파(school)란 의미의 말입니다. 나중에 이 말은 어떤 분당이나 분파, 나아가서는 이단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인들이 이 말을 쓴 것은 정통파 유대교와는 상당히 다른 분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바로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자신에게 이 이름을 붙였지만 나중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나사렛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한 것은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후로 줄곧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대로 메시아가 나타나니까 이단자라고 배척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오신 분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전15:3-4)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십니다. 성경대로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성경대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성경대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입니다. 성경대로 승천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모든 정죄와 심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왜곡합니다. “예수에 대한 열 가지 의혹” “예수는 과연 역사적 인물인가?” “예수는 불제자였다” 등등. 온갖 루머를 퍼뜨려 예수 그리스도를 비하하고 왜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마다 지옥의 파멸에서 구원하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십니다.

셋째로, 성전에 대한 왜곡입니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24:6)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렇게 고발한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의 금지 구역에 끌어들였다는 루머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인 일이 전혀 없습니다. 군중들이 루머를 듣고 흥분했을 뿐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부화뇌동 한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면서도 같은 죄목을 씌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막15:29)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23:1-2) 성전을 모독했다! 백성을 미혹했다! 가이사를 배반하게 했다! 자칭 왕이라 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문제를 교묘하게 로마 법에 저촉한 죄로 각색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 때문에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위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면 로마 군에 의해 돌 하나 남김없이 다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건물, 보이는 교회 재산 너무 위하지 마세요. 그 마음으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위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동조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목청을 높여 환영했습니다. 어떤 사본에 보면 6-8절에 이런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율법에 의하여 심판하려 하였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가고 고소하는 자들은 당신에게 오도록 명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좀더 유력한 사본들에는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도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구절이 본문에 들어 있다면, 다음 구절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24:7-9) 여기서 “그를 심문하시면” 할 때에, “그”란 천부장 루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더둘로의 변론은 유대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만족해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가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루하루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참고 인내합니다. 때로는 병들어도, 재산을 잃어도, 모욕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이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방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는 불신자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합니다. 왜곡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비난합니다.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철학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반박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걷는 길입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담대하세요.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