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013년 6월 21일

바울이 공회 앞에서 증언하다.
사도행전22장30절~23장11절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행22:30)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23:1)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2)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3)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5)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6-8)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0)

1. 공회 앞에 세워진 바울은 무엇을 증언하였습니까?

이제 바울은 천부장이 지휘하는 로마군의 영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천부장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유대인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행22:30) 공회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이미 공부했습니다. 공회는 명실상부한 유대인 사회의 최고 기구입니다. 산헤드린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었고, 각 지파별로 선출된 총 72인의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종교, 윤리,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고, 사형 판결을 제외한 상당한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하도록 한 것은 바울에 대한 군중들의 소란을 유대 사회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자기 변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청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의 설교는 두 가지 고백, 즉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 받는다는 고백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고백을 중심으로 공부 하고자 합니다.

2. 바울의 두 가지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 고백입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23:1) 바울은 양심 발언을 자주 했습니다.(행24:16, 고전4:4, 고후1:12, 딤전1:5, 딤후1:3 등 21회 사용)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주관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만, 그 율법을 판단하고 적용하는 일은 바울이 양심껏 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양심껏 섬겼다고 하니까 아나니아가 버럭 소리쳤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2) 여기 나오는 아나니아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아닙니다. 바울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란 유대인 중에 흔한 이름으로, 히브리식으로 하나냐(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NEBEDAEUS의 아들로, 헤롯 안티파스 2세에 의해 주후 48년에 대제사장이 되어 주후 59년까지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성격이 난폭하여 사람을 잘 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니까 바울도 정면으로 맞받아쳤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3) 회칠한 담이란 말은 유대인 무덤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을 보면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넣은 후에는 봉하고 회칠을 하여 치장합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안에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당장 법정에서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율법 어디에도 죄목 없이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법정에 세우라는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죄를 정하지 않은 미결수의 입을 발언하는 도중에 때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5-16)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66년 친 로마 정책에 반감을 품은 셀롯 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회칠한 무덤 같은 공중 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책망하니까 대제사장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4-5) 바울은 즉시 사과했습니다. 아, 그런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정말 몰랐을까? 학자들의 해석도 두 가지입니다. 아나니아를 이름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와 대면한 일이 없기 때문에 얼굴은 잘 알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고, 반면에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모를 리가 없지만, 짐짓 모른 척 하고 책망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나니아를 비난한 일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개인적 사과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란 공적 직분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대제사장을 욕한 것은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지만, 율법에도 어긋났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사과는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실제로 증명해 준 행동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양심껏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절대 판단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이전의 양심은 제대로 된 양심이 아닙니다. 인본주의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반쪽 누더기 양심입니다. 죄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거듭난 양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해도 아직도 100% 온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양심”이란 말은 헬라어로 “함께지각(知覺)한다”, 즉 공통의 인식이란 뜻입니다. 영어 단어의 conscience란 단어도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양심 자체는 각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판단은 결코 주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공통으로 인식하는 판단의 범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 양심이 기준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표준으로 해서 공통의 인식 아래 각 사람이 적용해 나갈 뿐입니다.
내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면 다른 사람도 양심껏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아나니아가 왜 화를 냈습니까? 자기 양심은 양심이고 바울의 양심은 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남의 양심에 개입할 만큼 훌륭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남이 양심껏 한 일을 가지고 함부로 비판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사람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시나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외 없이 다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양심은 내 양심만 양심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감동만 성령의 감동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특정 성도의 양심만 감싸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의 마음에 작용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도 양심입니다. 존중해 주세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하나님 법대로 섬기세요.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에 감히 개입하지 마세요. 내 양심을 지켜가세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삶에 대해서 각자 하나님과 계산하시면 됩니다.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 받는다

두 번째 주제는 부활입니다. 바울은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6-8)
부활 소망 때문에 법정에 섰습니다. 굳이 서지 않아도 될 법정입니다. 여러분, 법정에 서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교회 교육관 보증금 떼어먹은 사기꾼 때문에 법정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평생 살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곳입니다. 가지 마세요. 바울은 죄수가 아닙니다. 붙잡혀 재판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살벌한 법정에 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세 차례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수십 개 국가, 수백 개의 도시를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은퇴한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것도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상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남은 생애를 죄수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으로 있을 때보다 죄수로 있을 때에 더 많은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재판 받으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남은 기간을 죄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중간에 풀려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붙잡혀 순교 당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천부장의 법정, 유대인 공회, 헤롯 아그립바, 베스도 총독, 벨릭스 총독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변론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한 사람마다 결론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죄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굳이 풀려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갔습니다. 황제 앞에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은 위험한 곳입니다. 그릇된 판결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죽음에 도전했습니다.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바울은 삶의 매 순간 죽음 앞에 서서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부활 소망을 든든히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발언은 공회를 두 쪽 내고 말았습니다. 공회원의 절반은 사두개인이고 절반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서로 다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주로 제사장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 당시 헤롯 왕가나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정치적인 특권도 누리고 성전의 지배권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대중적 인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승과 율법을 거부하였고, 구약은 윤리적인 부분만 채택하였습니다. 천사, 영적 존재, 영혼 불멸,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가 곧 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내세나 영적 세계를 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얘기한 바울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크게 떠들 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9) 부활 문제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잘못하면 바울을 서로 잡아당겨 찢어지게 생겼습니다. 공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난장판이 됐습니다. 천부장은 군인들을 명하여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9-10)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 양분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혼도 믿지 않고, 세상 종말도 믿지 않고,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부활 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세상에서나 잘 먹고 잘 살자고 합니다. 현세에 매인 사람으로 살게 만듭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부활 소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 웰빙을 위해 살 것인지?

3.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양심껏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그러나 내 양심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을 불완전합니다. 양심껏 살되 겸손해야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처럼 남의 양심에 간섭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양심껏 섬기듯이 남들도 다 나름대로 양심껏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해야 될 일까지 대신 하지 마세요. 교회를 세우시고 움직여 가시는 원동력이 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까지 대신 하지도 마세요. 성령님은 지금도 각 사람의 양심에 작용하고 계십니다. 내 양심을 움직이고 계시듯이 남들의 양심도 움직이고 계십니다. 모든 섬김, 모든 잘잘못에 대한 계산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서면됩니다. 미리 앞당겨 계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묵묵히 내 할 일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둘째로 부활 소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녁에 침상에 누우면서 내일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잡니다. 하나님이 일어나게 해 주시면 계속 사는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면 그냥 부활 대기자로 가는 겁니다. 매일매일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살아날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너무 세상 일 혼자 다 할 것처럼 나서지 말아요. 교회 일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원동력은 성령이십니다. 사람은 그저 성령님께 사로잡혀 맡은 부분을 감당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 하려고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겸손히 내 앞에 놓인 일을 하면서 다가 올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