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회 공과 2013년 6월 14일

바울이 변명하다.
사도행전22장6절~5절

1. 바울은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바울이 최초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건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내 종교적 선택이나 결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자녀들을 선택하고 부르십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신4:37)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9)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2)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13:27)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선택된 사람을 부르십니다.
부르시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년기에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장년기에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늙어 죽기 직전에 부르십니다. 부르시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색하다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어 죽게 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 실패로, 어떤 사람은 자녀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친구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나 사건을 통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에 호의적인 상태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부름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죄 많이 짓고 나쁜 짓 많이 하다가 부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얌전하고 착실하게 살다가 부름 받습니다. 현재 반대자라고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현재 사회적 범죄자라고 부르심에서 제외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부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을까요? 바울은 본래 기독교에 추호도 호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반기독교 선봉장이었습니다. 반기독교 적인 사람들도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식한 반대자들입니다. 아무 논리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무조건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유식한 반대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뭇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배척합니다. 지식인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식자층에 속했고, 집안이 좋고 배경 좋은 로마 시민권 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부르셨을까요? 무식하게 부르셨을까요? 아니면 논리적 설득으로 부르셨을까요? 첫 번째입니다. 지식인이라고 논리적 설득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인간적 판단으로 본다면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직접 눈 앞에 나타나셔서 굴복시키셨습니다.
바울은 살기 등등 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오늘날의 다마스커스입니다. 당시 바울의 이름은 유대 식으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도시인 다메섹으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런 피신 자들까지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거의 다 왔을 때입니다. 시간은 정오쯤입니다. 머리 위로 눈부신 태양 빛이 쨍쨍 내리 쬐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 사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사울은 그 빛에 눈이 멀었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6)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7) 사울이 땅에 엎어져 떨고 있을 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7) 사울은 눈이 감겨 누가 부르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8)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못 박아 죽였던 바로 그 예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 앞에 있는 청중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죽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성도들이 예수를 전하는 것 때문에 노기등등(怒氣騰騰) 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서 논리적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실(fact)을 알리는데 주력했습니다. “내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특별히 바울처럼 갑자기 엎어져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 하다가 망해서 엎어진 사람, 병들어서 엎어진 사람, 배신당하고 엎어진 사람, 불의의 사고로 엎어진 사람, 갖가지로 엎어진 사람들 앞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엎어진 순간은 부르심의 순간입니다. 주님이 초청하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사울만 들을 수 있었던 소리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초청, 영혼의 부르심입니다. 사울을 부르신 주님의 음성은 오직 사울만 들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9) 이 장면은 매우 이상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한 장소에서 일을 당했습니다. 광채도 같이 봤습니다. 소리(sound)도 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오직 사울만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빛을 보고 소리만 들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대화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사울만 부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지만,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으로 깨닫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별적이고 영적입니다. 이것을 내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음성이 아닙니다. 마음에, 영혼에 들려오는 영적인 음성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전도를 받았다고, 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열려서 깨닫고 믿게 되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겉으로 나타난 빛과 소리만 보고 듣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개별적인 것이며, 내면적인 것이며, 특별한 초청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러면 내적 부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육신의 귀에 음성이 들려와야 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정말 육신의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나도 그런 주님의 소리를 좀 들어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전혀 부러워하지 마세요. 내적 부르심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깨달아지는 확신입니다. 그렇게 많은 전도를 받았어도 전혀 귀에 들리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자신이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영적 안목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내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인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초청에 모두 응답 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부르심에는 두 가지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위한 초청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삼으시고자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둘째는 직분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직분을 맡기시려고 부르십니다. 이것을 직분에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사울이 어떤 직분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사울은 주님 앞에 엎드려서 질문합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10상)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주여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지금 할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던 사울이 갑자기 바보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많았던 사울이 할 일이 없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울이 지금까지 열심히 살긴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무슨 중대한 일을 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쓸 데 없는 일만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으러 다녔습니다. 그것이 가장 유대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가 앞장서서 해야 될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야말로 가장 쓸 데 없는 일이요, 무가치 한 일이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무엇이 중대하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서로 이것이 중요하다 하여 목숨 걸고 싸웁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2개 연합국과 4개 동맹국이 싸웠습니다. 6500만 병력이 동원되어 치고받고 싸웠습니다. 850만 명이 사망하고, 2100만 명 부상 당하고 770만 명의 전쟁포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해결되었습니까? 전쟁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49개 연합국과, 8개 동맹국 측이 약 5년 간 싸웠습니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가 2,500만 명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해결되었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냉전시대가 열렸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지구상에서 수 천 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해결되었습니까? 공산주의 실험은 지구상에서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버릴 만큼 소중한 일이었습니까?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자신에게 질문해 보세요. 내가 지금 열심히 뛰어다니는 이 일이 과연 내 정열을 바쳐서 일할만큼 가치 있고 중대한 일인가? 사울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10상)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전혀 하나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은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셨습니까? 그러면 내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물으세요. 그렇다고 내가 하던 모든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가정 일, 사업적인 일, 직업의 일, 세상에서 맡았던 모든 일들을 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목적과 동기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내가 왜 결혼했나? 내가 왜 자식을 낳았는가? 내가 왜 직장생활을 하는가? 내가 왜 사업을 하는가? 내가 왜 사회적인 직분을 맡았는가? 하나님께 질문하세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이 질문은 계속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주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10하)
새로운 인생을 보려면, 새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사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눈이 감겼다가 떠진 겁니다. 옛날 눈은 감기고 새 눈을 떴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대면했을 때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감게 하셨습니다. 예전의 눈, 육신의 눈, 세상적인 눈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옛날 시야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눈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안목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안내를 받아야 될 처지에 있습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11) 우리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안목으로 인생을 출발하는 계기가 있어야겠습니다.

오늘 공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기독교분자인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첫째는, 자녀 삼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둘째는, 복음 전파의 사도직을 맡기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도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영적인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평가 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예전의 눈은 뽑아버리고, 새 눈을 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시력은 버리고, 영적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직업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의 안목을 새롭게 가질 때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왜 사울을 아나니아란 사람에게 인도합니까?.

그 다음 말씀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장면 입니다. 사울이 다메섹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모습 앞에 눈이 멀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일행의 손에 이끌려 직가(直街:곧 바로 난길)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 캄캄한 눈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갑작스런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12-13) 사울이 예수님 앞에 엎드러진 이후에를 인도한 사람은 아나니아란 사람입니다. 아나니아가 누구인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는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될 때에 믿게 된 신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다메섹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본래 다메섹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전도를 받고 다메섹으로 돌아간 경우입니다. 둘째로, 그는 본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다메섹으로 피신하여 거주한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아나니아는 유대인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가 율법에 경건한 사람이며, 다메섹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지금 사울은 예수를 전한 것 때문에 분노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변론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아나니아가 유대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으로 존경받으려면 우선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고, 토라를 외우고, 정결 예식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와서 눈을 뜨게 해 줬습니다.
사실 아나니아는 좋아서 사울을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세요.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는 망설였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은 살기등등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아닌가? 그런 사람을 왜 찾아가란 말인가?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3-14) 아나니아가 망설일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해줬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아나니아가 기도할 때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눈을 떴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눈을 뜨게 된 내력을 얘기해 줬습니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 네가 만난 분은 예수님이시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을“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울은 예수님을 유대교를 파괴하는 이단 교주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아나니아는 의인이라 불렀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지금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의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사울에게 보낸 분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는 하나님,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타난 이단자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눈을 뜨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할 일도 가르쳐 줬습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5-1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두 가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줬습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해야 될 직무입니다. 둘째로,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공적 표식이요 절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는 사람들 앞에서의 증표입니다. 세례는 믿음의 결과로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믿고 죄를 씻었기 때문에 받는 표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반드시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울에게 새로운 인생길을 가도록 안내해 준 아나니아의 역할입니다. 아나니아는 최초로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두 가지 획기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첫째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일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준 것보다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안목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물질관,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둘째로, 그가 해야 될 직무를 가르쳐 줬습니다. 즉,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진로를 결정해 줬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사울 앞에 나타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은 어느 날 사울이 잠자는 동안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신실한 신자로 만들어 가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홀로 믿어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인도를 통해서 사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사울의 생애에 영향을 준 인물은 아나니아 뿐만이 아닙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을 사울에게 보여줬습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워줬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변화시키시고 나를 아나니아로 사용 하실 지도….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런 영향은 오랜 접촉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짧은 기간의 만남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나 역시 그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중하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누구의 삶을 바꿔 놓으실까? 나 때문에 자식들의 삶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 직장 동료의 인생길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의 삶이 바뀔 수 있고, 나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사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직업이 바뀔 수도 있고, 가정이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실족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용기를 얻고, 나 때문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죄 짓던 사람이 회개하고, 나 때문에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사람은 사람에 의해 다듬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성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이 달라집니다. 인격이 달라집니다. 생각과 사상, 가치관이 변합니다. 사상이 변하면 사는 방식도 변합니다. 직업도 변하고, 하는 일이 변합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결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흥분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안토니아 요새 계단에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설교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지 3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면까지 얘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말까지 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라!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을 향해 나가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2-23) “이 말하는 것까지” 즉,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흥분했습니다. 이방인이란 말에 유대인들은 미친 듯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방인은 개나 돼지 같이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지키기 않는 이방인이, 단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말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리 질렀습니다. 저놈을 죽여라! 살려둬서는 안 될 사람이다! 고함 쳤습니다.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흙을 공중에 뿌렸습니다. 극도로 분노한 표시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처럼 바울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가만 놔두면 돌팔매질이 시작될 지경입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군 영내로 데리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영내로 들어온 천부장은 즉시 바울을 심문하려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떠들어대는가? 사유가 궁금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24) 가장 손쉽게 자백을 받아내는 방법은 고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결박하고 채찍질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가죽 줄로 바울의 손을 붙잡아 맸습니다. 로마 시대의 채찍은 짐승을 다루거나 노예를 다루는 데 사용했습니다. 채찍은 단단한 막대 끝에 가죽 줄을 매고, 그 가죽 줄 끝에 금속이나 뼈 조각을 매달았습니다. 한 번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채찍에 맞다가 죽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채찍의 상처는 일 년이 가도 잘 낫지 않았고, 평생 불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점잖던 천부장이 왜 갑자기 혹독한 채찍질을 하라고 했을까요? 본래 천부장은 폭도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군의 영내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군중들을 향해 말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변명의 기회도 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천부장이고 뭐고 막 대들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게 생겼습니다. 천부장은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바울이란 사람이 어떤 범죄자란 말인가? 일단 심문하여 이유나 알아내자! 그는 손쉬운 방법으로 채찍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당시 이런 식의 범죄자 고문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주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로마 시민권 덕을 본 바울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바울이 내민 것은 로마 시민권입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25-26) 로마 시민권자를 재판도 없이 잡아매거나 때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로마의 발레리안 법(Valerian Law, BC509)이나 포르시안 법(Porcian Law, BC195)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 자를 재판 없이 붙잡아 매거나, 때리거나, 일체의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의 조치는 명백한 불법입니다. 재판을 하지 않고 범죄자로 몰아 손을 묶은 것도 불법이고, 때리라고 한 것도 불법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백부장은 당황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권자라고 합니다!
천부장은 깜짝 놀라 반문합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27) 이어지는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 대답하니까 천부장은 엉뚱한 말을 합니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28) 바울은 외형상 잘 생긴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척 보면 미남에 인텔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잖아요? 대학 공부를 못했어도 유학 갔다 온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있잖습니까? 천부장이 볼 때 바울은 꾀죄죄하게 생긴 것이 천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로마 시민권자라니? 그 얻기 힘든 로마 시민권을 저렇게 초라한 사람이 갖고 있을 리가 있나?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한 말이 바로 자신의 로마 시민권입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로마 시민이 됐나? 바울의 대답은 더 놀랍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권을 얻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생득적 시민권입니다. 로마 시민의 자녀는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이 됩니다. 둘째는 후천적 시민권 획득입니다. 로마 제국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거나, 혹은 사회적 지위와 돈이 있어 매수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경우입니다. 생득적 시민권자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부모가 로마 시민권 자였을까? 어떤 학자들은 이런 추측을 합니다. 바울의 부친, 혹은 조부가 로마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바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다소입니다. 당시 길리기아의 다소는 헬라적인 문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로마화 되면서 아마 바울의 부친이나 조부가 로마의 폼페이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천부장의 경우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그는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합니다.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23:26)입니다. 로마식으로 발음하면 클라우디우스 루시아입니다. 클라우디우스란 이름은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부인이었던 Messalina는 로마 시민권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을 샀던 사람들은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서 클라우디우스란 이름을 많이 붙였습니다. 천부장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루시아입니다. 그는 헬라인이었는데 돈으로 로마 시민권을 샀고, 로마군의 고급 지휘관이 될 만큼 지위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평소 생각이 바울에게 시민권을 얻은 경위를 얘기하게 된 배경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 제국에서 신분보장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로마 시민권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마음대로 묶고 때리라고 했으니 속된 말로 모가지 감입니다. 백부장이나 천부장이 두려워 한 것은 당연합니다.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9)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 로마 시민권이 그에게 한 몫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