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2월6일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4장1절~25절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먹는 한 노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항상 노예 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목사님들이 입는 예복을 입지 않고 노예들이 입는 복장을 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 복을 입고 삽니다.” 이 목사님의 이름은 J.뉴턴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amazing grace” 우리나라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이 존 뉴턴 목사입니다. 미국에서 911테러 사건이 있고난 후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가 “amazing grace”입니다. 존 뉴턴 목사님은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을 역시 선포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멸망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는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즉 은혜(카리스)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로마서 4장에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1-8절), 할례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9-12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13-16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17-25절)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이 있다면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있을까요?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1)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유는?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1절에 나오는 ‘육신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어떤 것, 곧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들고 나갈 수 있는 자랑거리를 말합니다. 즉 2절에 나타나는 ‘행위, 선행’을 의미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다면 아버지 데라와 함께 출발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까지 왔습니다. 하란이 어디입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최 변경지대입니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습니다. 데라가 거기서 죽어 장사지낼 때까지 하란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란에서 머뭇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아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라는 말은 아브라함 편에서 쓸 수 있는 ‘마침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쓸 수 있는 마침내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이끌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들어갔으면 거기서 정착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땅에 기근이 있다고 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닌 애굽에 땅에 내려가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실수를 한번만 저질렀습니까? 창세기 20장에도 가보면 그랄에서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하지만 사실 존경 할 만 한 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허물투성이요, 실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반듯한 행동 때문에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희망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연약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자기 아내마저 지키지 못하고 누이라고 속이는 비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창세가 15장을 보면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어언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일점혈육도 없었습니다. 팔순이 넘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산다는 것이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밖에 나가보니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너무나도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가당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멘”한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받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행함 때문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2)아브라함은 언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기 전입니까? 그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 할례시니라.”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하여 그들의 선민의식을 강하게 구축하던 시기입니다. 할례 자에게 만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누린 은총과 칭의(稱義)를 동일하게 누렸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할례를 받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 사건이 있은 지 1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창17:24-26절). 그렇다면 할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 할례 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믿은 사실을 추후 적으로 인증한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 역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기에는 믿음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세례는 헛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을 때 세례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선민이 되는 유일한 길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그 당시 유대인의 사상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폭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성도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할례나 세례가 결코 의롭게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아브라함은 의롭다함은 결국 누구를 위함이었습니까?

앞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칭의(稱義)가 할례와 무관하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칭의(稱義)는 율법과도 무관한 것임을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력하여 율법이 명하는 바를 준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에 율법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道)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아브라함의 믿음,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토록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갈이라는 첩을 얻어 대를 이어 보려는 인간적인 술수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 종 다메섹 엘리 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생략하시고 결과만을 놓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허물이 있고 실수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왜 신약에서 말씀합니까?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야기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우리의 행위나,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다윗은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까?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국기에 다윗의 별을 새겨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인간적으로 보면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늘 말씀 7-8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 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입니다. 자기가 무조건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 다윗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의 회개의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범죄하고 난 후에 처절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시 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시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게 한 일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였습니다. 다윗은 적어도 일 년 동안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상태가 어떠하였습니까? 뼈가 쇠하고 하나님의 압박을 받아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복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다윗도 따지고 보면 죄가 없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잘 처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허물을 덮어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진리를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바로 노동의 법칙입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해서 받는 삯은 정당한 대가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일을 안했는데도 일당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됩니다. 노동자는 일한 만큼 삯을 받습니다. 삯을 받는데 특별히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변변히 하지 않았거나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받게 된다면 아주 황송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격이 있었습니까? 다윗이 자격이 있었습니까? 모두다 죄인이요,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3절에 “여기신바”라는 단어는 ‘간주한다,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의 구좌에 돈을 넣는다는 뜻입니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11번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긴다, 인정한다, ……으로 계산한다.”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봉급을 받습니다. 요즘은 웬만한 회사는 사원들에게 직접 현찰을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온라인을 통하여 계좌에 입금을 시켜줍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구원받기 위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격 미달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5절에 ‘일을 아니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의롭게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는 성품이 깨끗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만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좌에 예수님의 의를 갖다 넣고 예수님의 계좌에는 우리의 죄를 갖다 넣는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지 못하였으나 의롭게 산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깨끗한 성품이 아닌데도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이런 행복을 맛보시며 누리십니까? 요즘 동네마다 경로당이나 마을 회관이 생겨서 어른들이 재미있게 노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참 행복입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재미를 맛본다 할지라도 진정한 행복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하늘에 계신 주 예수를 영원히 섬기리!”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도 없고 일한 것도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기뻐 뛰며 찬송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