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1월15일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로마서3장1절~8절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Immanuel Cant)의 아버지가 고향인 폴란드의 실레시아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깊은 산 속을 통과하고 있는데 강도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강도들은 값진 것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전부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여 그것이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칸트의 아버지를 가게 했습니다. 말도 빼앗겨서 숲속을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을 피하여 빠른 걸음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손에 무엇인가가 잡혔습니다. 그것은 속옷 속에 안전하게 꿰매어 보관한 금덩어리였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금덩어리를 들고 강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아까 내가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소, 내가 무서워서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소. 자, 여기 내 옷 속에 감추었던 금덩어리를 받으시오.”

강도들이 이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빨리 받으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금덩어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한 강도가 빼앗은 지갑을 갖다 주었습니다. 또 다른 강도는 빼앗은 기도 책을 갖다 주었습니다. 말도 끌고 와서 돌려주었습니다. 강도들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는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잘 가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진실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참이신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곳이므로 진실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짓이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진실이 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오해를 받아도 나만 참되다면 하나님께서 풀어주십니다. 반드시 풀어 주십니다.

오늘은 로마서 3:1∼9는 하나님의 참 되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의 나음은 무엇인가?”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제는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유대인의 나음은 말씀을 받은 것이요 그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의 참 되심 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참 되심이 선악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오늘 로마서 말씀의 중심 입니다.

1.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먼저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로마서 오늘 공부할 말씀에는 유대인의 나음의 첫째가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을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를 말했습니다. 로마서 9장 4∼5절을 보면 여러 가지 유대인의 유익이 있습니다.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을 세우심, 예배, 약속, 또 육신적으로 그리스도가 동족이라는 것 등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전통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성경 말씀입니다. 이방의 기복종교와 비교해 볼 때 어느 종교가 뚜렷하게 하나님 말씀 위에 서 있습니까? 어느 무당이 성경 말씀을 또박또박 가르칩니까? 기복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단순히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말씀 위에서, 말씀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을 뜻하는 헬라어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고스’이고 다른 하나는 ‘레에마’입니다. 로고스는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일반적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 중에 어떤 부분이 성령으로 내 삶속에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큰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그 말씀은 레에마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씀은 말씀이로되 내 삶속에서 역사 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성령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은 살아서 우리 속에서 역사 합니다.

2. 왜 바울은 하나님의 참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말씀의 중심이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택하신 하나님이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를 묻습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의 답변은 간단명료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서 실패한 책임을 어찌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3∼4절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의 책임은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저들이 믿지 않고 범죄 함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불성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우시며 어떠한 판단에서도 그 분은 옳으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합니다. 신정론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열심히 믿으려고 애쓰는데도 어렵게 되고 불의한 자들이 형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어찌 의인이 고난 당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그래도 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지구는 여전히 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믿던 안 믿던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당장은 모호한 것 같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신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전적 수용(Total Acceptance)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잘 쓰는 말 중의 하나가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즉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원망하지 말고 전적으로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적 수용, 전적 아멘, 이것이 참 신앙의 기본입니다.

욥은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는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 받으 실지어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은 큰 교훈이 됩니다. 애급에서 건짐 받은 일행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12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12명이 똑같이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한 반면 10명의 정탐꾼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은 흥분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차라리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크게 책망하시며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즉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며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후회하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신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은 백성들의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저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들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여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고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참 되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3.하나님의 참 되심이 선악의 기준임을 바울은 어떻게 설명 합니까?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또 다른 질문을 들어봅시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그것을 불의 하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5∼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나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리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옳은 일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또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 과정이야 어떠하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결과만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고자 하지 않겠느냐, 저희가 정죄받는 것은 당연하다.”

가롯 유다의 경우를 살펴보십시다. 가롯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월절 명절이 지난 뒤에 예수를 잡으려 하였었습니다. 백성들의 동요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서둘러 예수를 팔음으로써 급히 체포하고 처형함으로 유월절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유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순조롭게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가롯 유대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받은 형벌은 마땅한 것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죄는 죄입니다.

구약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형제들이 그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이를 믿음 안에서 좋게 해석하였습니다. 즉 형제들이 그를 판 것은 자기 가족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입니까? 결과가 좋았으니 과정은 무시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야 어떻든 죄는 죄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꿩 잡는게 매다’라고 합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수단방법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식 발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가진 자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평등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도 좋지 않고 과정은 물론 안 좋은 전례를 남겼습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섬뜩한 말입니다.  이런 사고 구조는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좋은 결과라도 좋은 방법과 과정을 통하여 얻어야 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할 수 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신 분입니다. 진실만이 통할 수 있습니다. 참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참만이 통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성공했다고 말하는 가치관은 위험하니 멀리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합법적으로 벌어야 합니다. 조금을 벌더라도 덕스럽게 벌어야 합니다. 출세를 하려고 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불의한 방법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켜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안에서 진실하여 참되어 영원히 하나님께 사랑 받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