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 고신대교수, 역사신학>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기독교회를 식민통치를 방해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와 국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사회 계몽, 신교육운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식민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회유와 탄압, 곧 양면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은 부일(扶日)과 친일 혹은 변절자의 길을 갔고, 다른 이들은 반일 저항, 혹은 순교자의 길을 갔다.

해서교육총회사건, 105인사건, 삼일운동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지만, 일제는 조선교육령(1911. 8),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 3), 포교규칙(총독령 제83호, 1915. 8), 조선교육령을 개정한 제2차 조선교육령(1922), 제3차 조선교육령(1938), 제4차 조선교육령(1943), 그리고 종교단체법(1939. 4) 등 입법 활동을 통해서도 기독교회와 기독교육을 탄압했다. 1935년 이후 10년간 기독교인들에게 강제한 신사참배는 기독교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탄압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단체를 강제로 해산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1936),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YWCA, 1938), 그리고 주일학교연합회(1938) 등은 해체되었다. 성결교(1941) 성공회(1942) 안식교(1943) 침례교(1944) 등 군소교단들도 해산되거나 해체되었다. 교회는 국방헌금, 교회 종(鐘)과 놋그릇 등 금속회수(金屬回收)를 강요당했다. 성경과 찬송가의 일부는 사용금지를 당하고, 교회는 통폐합되어 그 수가 축소되었다. 예배도 제한을 받았고 설교는 감시를 받았다. 신학교도 강제 병합되기도 했다.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존립 교단들도 통폐합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편입되었다. 한국 기독교회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숨 막히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은 신교(信敎)의 자유이자 영적 해방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있던 20여명은 평양 대구 광주 부산 등 각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대구형무소에서 김두석 김야모 이술연, 광주에서 손양원 등이 석방되었다. 평양에서는 고흥봉 김화준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오윤선 이기선 이인재 주남선 조수옥 최덕지 한상동 김형락 박신근 안이숙 양대록 이광록 등이 8월 17일 저녁 12시 경 석방되었다. 이들을 늦은 밤에 석방한 것은 환영 인파들에 의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를 막아보겠다는 의도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들이 출옥한 날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의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 보호 관찰령 제3호’에 의해 처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한국교회 지도자 다수를 학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때는 다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된 상태에 있었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민족지도자들을 학살함으로써 한국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악행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보호 관찰령 제3호’ 지령에 의한 학살 예정일은 1945년 8월 18일이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인 8월 15일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 명단에 올라있던 옥중 성도들은 8월 17일 밤에 석방된 것이다. 갑작스런 해방으로 일제의 음모는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일제의 학살음모였던 보호관찰 령 제3호가 알려진 것은 해방 직전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주임이었던 최운하(崔雲霞)의 폭로에 의해서였다. 그는 일제시대 고등계형사 출신이었고 미군정하에서는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서대문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 음모는 사학자 문정창(文定昌, 1899∼1980)에 의해 확인되었고, 그는 이 점을 자신의 ‘국군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 기록하여 두었다.

문정창에 따르면 일본군은 미군의 인천과 부산 상륙을 예상하고 미군이 상륙하면 조선인 지식인들이 미군과 합세하여 일본인들을 크게 해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선인 지도자급 학살계획을 수립했음을 지적하고 그 수가 약 5만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하권, 449∼550쪽). 또 일제가 한국인들을 질식사 시킬 20평 규모의 살인굴을 영변군 영변읍 외산곡에 파 놓은 것을 확인했다는 사실도 부기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H Moffett)은 그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The Christians of Korea)에서 일제의 살인 음모가 있었음을 말하고 이 음모는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교사 방위량(William Blair) 또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방위량은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들은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 진주할 것을 예상하고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에게 협력할 것을 우려, 1945년 8월 중순경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을 모두 학살하도록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Gold in Korea).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이 은혜였다. 1945년 8월 18일 석방된 이들은 흔히 수진성도(守眞聖徒), 출옥성도(出獄聖徒)로 불렸다. 초대교회적 개념으로 말하면 이들은 ‘고백자’(confessor)였다. 데시우스 황제 치하의 혹독한 박해에서 일부는 순교자의 길을 갔다.

비록 순교는 면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고백자라고 불렸다. 출옥성도들은 한국의 고백자들이었다. 이들의 출옥과 함께 한국교회에는 해방된 조국에서의 새로운 교회 건설의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