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4년 1월3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로마서6장1절 ~ 11절

플로리다의 감리교 목사인 빌리 류터(Billy Lewter)는 다락방이라는 기도서에 아버지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에다 도박꾼이었습니다. 그의 식구들은 대공황이 왔을 때 교회에서 주는 급식으로 연명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류터가 6살 되었을 때 가출해 버렸습니다. 후에 그는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도둑이 되었고 경찰서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살하려고 하는 찰라 그의 어머니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교회에 나갈 것을 간곡히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못된 아버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쓰레기 같던 사람이 자기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인 무학이었으나 성경말씀 500절을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유치장, 교도서,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미국의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류터 목사는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기적이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신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시대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5:20)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죄를 더 많이 깨닫게 되면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더 많이 지으면 더 많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말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 가운데 더 살 리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설명하여 봅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합하여’, ‘연합한’, ‘함께’라는 말들이 9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속하여 죄에 종노릇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일 우리들이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아멘.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했다는 또 다른 의미는 옛사람 육은 죽고 새 생명 가운데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의 표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랄프 윈트라는 신학자는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하는 것보다 관을 갖다 놓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조금 찍어 바르니까 죽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람을 관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어떤 수련회에서는 이런 의식을 갖기도 합니다. 땅을 파고 또 관이 들어갈 만큼 파고 그 속에 한 번씩 들어가 누웠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죽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옛날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는 세 가지 절차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희생의 제사요, 둘째는 할례이교, 셋째는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식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습니다. 먼저 세례 받을 사람이 머리와 손톱을 깎습니다. 그 다음에는 옷을 벗습니다. 다음에는 물속에 전신을 담습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례를 받으면 한 살짜리 어린아이로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어른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나이는 접어두고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우유까지 먹였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완전히 새로운 탄생으로 보았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의식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믿습니까?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레오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습니다. 이전에 욕망 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새로운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변했습니다.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행운의 무지개를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새 인생을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들임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던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대신 죽은 것만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만 생각하면 반쪽 짜리 신앙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의 모습도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 지내는 제물에 안수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이 나를 대신하여 죽지만 곧 내가 죽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제물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대신 죽이고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들의 대신 죽음을 통하여 나의 죽음을 체험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죄의 실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뿌리가 남아 있으며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죄는 성도가 거듭난 후에도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역사 합니다. 죄의 실체가 싹없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죄의 실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로부터 자유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범하려는 고의적인 의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5절의 말씀 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면 우리가 본받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죽은 것입니다. 회개나 세례는 옛사람의 자발적인 죽음입니다. 남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비판합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옛사람(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산 생활)을 죽일 때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무서워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 무서워서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체면 때문에 죽어지내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지못해서 죽은 척 하고 있습니다. 목사 체면 때문에, 장로 권사 체면 때문에, 집사 체면 때문에 죽은 척 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옛사람이 다 살아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마지못해서 죽은 척 하지 맙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옛사람을 죽입시다.

 

3.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11절의 말씀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해야 합니다. 6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죄에 종노릇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야 합니다. 살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만 강조하고 행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옛사람이 죽고 구원을 받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말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어야만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의 약점은 믿음을 입으로만 말 하면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다가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 이야기하고 사는 것은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루터에게도 나타났었습니다. 하루는 루터의 아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 루터 박사님, 왜 우리는 왜 지금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했던 때보다 기도나 신앙훈련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개신교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성결의 신학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결, 즉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 개신교의 살 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이중적 삶을 흉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이 지켜가는 도덕적 수준을 뛰어 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도덕 수준을 넘지 못하면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의 약점을 웨슬리의 성결의 신학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의 말씀으로 결론짓겠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