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8월9일

바울의 변명

사도행전26장1절~23절

 

오늘 공부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 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헌신하고자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됩시다.

 

1. 바울 변론의 특색을 말하여 봅시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인사차 오자, 베스도 총독은 유대 문제에 능통한 유대의 아그립바 왕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아그립바 왕과 바울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몇 번째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섯 번째입니다. 참 오래 동안 끌고 있는 재판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고소되어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벌써 다섯 번째를 맞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전을 모독했으며, 더 나아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꾸몄다고 고소함으로써 죽이려 했고 이에 대해 바울은 분명한 논리와 증거로 자신이 무죄임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못하고 이제 아그립바 왕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석방되지 못하면서도 같은 변론만 되풀이 하는 것이 울화가 치밀 수도 있고 몹시 짜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억울하다고 스스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변론하는 것을 지겹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보세요.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 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뭐라구요? 바울은 자신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그립바 왕의 장점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자꾸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느냐? 분명히 무죄가 아니냐? 빨리 석방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잘 보여서 목숨을 구걸하려구요? 자신이 분명하게 변론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바울에게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잔인했던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재판을 받을 때마다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하기 보다는 그 순간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을 수 있는 바울의 항소를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다구요? 바로,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각 중에 잘못된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전도는 기회를 살펴서 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여건이 될 때에만 복음을 증거 했습니까? 아니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항상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니깐, 이때 해야지!’, ‘저 사람은 바쁘니까, 나중에 와서 전도해야지’, ‘지금 나는 시장 가야 하니까, 돌아오면서 해야지!’, ‘지금 상사가 일을 시켰으니까, 끝마친 다음에 전도해야지’ 이렇게 핑계되기 시작하면, 평생가도 전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일이 사명보다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나에게 무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4절부터 계속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변론 시간을 통해서 아그립바 왕과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바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 도 있는 자리입니다. 말 한마디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변론 시간을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닫게 된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사명이라 여겼기에 지겹다고 생각지 않고 계속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언 합니까?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그리고 아그립바 왕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도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 부활 왜 못 믿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나를 지금 송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부활 신앙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저들이 믿는 바와 같이 부활신앙에 근거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9절부터는 바울의 간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어떤 사람이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한 때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열정이 어떠했습니까? 단순히 예루살렘에서만 핍박했습니까? 아니지요. 10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 있어서는 제1인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함에 있어 옥에 가두는 것은 일수이고, 죽이는 일에도 찬성하였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11절 말씀을 보니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다는 것”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부여받고 다메섹까지 갑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컸으면, 그 먼길을 선뜻 가려고 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바울의 열정은 11절의 “핍박하였고”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핍박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에디오콘(?δ?ωκον)’으로써,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와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이 지독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핍박하는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보다 더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변화됐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누가 바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될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만나니까, 예수 믿으니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삶의 목적과 비전이 바뀌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활약했던 미국 LA Dodgers에는 강타자 셰필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불행한 야구선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안고 운동장에 찾아와 셰필드를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셰필드는 요즈음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모범 선수로 불립니다. 그는 화려한 플레이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2년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가스펠 가수인 아내 디레온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내의 내조와 기도에 힘입어 마음의 안정을 찾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변화의 모든 공로를 아내에게 돌립니다. “디레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 비로소 삶의 의미와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 믿는 한 여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했던 것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이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돈에 좌우되는 인생이 아닙니다. 권력에 좌우되는 인생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은 매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나고자 힘쓰시길 바랍니다. 만나야 합니다. 매일 만나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매일 매일 예수님 만나는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은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살펴 볼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봅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주지요? 또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 시점이 ‘정오’라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밤에 만났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마도 “꿈꿨겠지”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한 낮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더 나아가 “햇빛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고 말합니다. 장렬하게 내리쬐는 대낮에 그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는 것 역시 바울이 체험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정오’라든가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체험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빛이 자신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동행들에게도 비추었다고 사실입니다. 14절을 봅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 이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 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가시채’라는 것은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킵니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찌르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네가 지금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네게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되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예수의 사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보다 강권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 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우선 ‘일어나 네 발로 서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불러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끔 주님께서 불러 당신의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부르실 때도,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왜 잣니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한 마디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는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을 증거 하는 일이기는 할터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7-18절 말씀을 봅니다.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과,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여 그들도 죄 사함과 나의 복을 누리게 하겠다” 바울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단의 권세에 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사명입니까? 우리의 사명은 아닙니까? 바울처럼 공부도 많이 하고 가문도 좋고 열심있는 사람만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바울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책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비켜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지금 성경공부하기 위해 오신 모든 분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습니까? 사명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명입니까? 영혼 구원의 사명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세상의 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많은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아직도 “예수 믿으세요!” 한번 전하지 못했다면,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신앙생활이 말도 못하게 부실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명,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전하다가 맞는 것에도 이골이 났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런 일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명이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시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섯 번째 재판을 받는 바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체험 –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복음 증거는 사명입니다. 사명은 명령입니다. 명령에는 순종해야 하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먹을 것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입을 것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살 곳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살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의 사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싫다고, 부끄럽다고, 어색하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왜 부르셨다구요? 복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전하기 위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바울과 같이 일평생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사시길 간곡하게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