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다

행26;24-29

 

1.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어떻게 미쳐 있습니까?

무엇엔가 미친 사람이 역사를 끌어갑니다. 그리고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자동차에 미친 헨리 포드가 온 세상을 자동차로 덮게 만들었습니다. 비행기에 미쳤던 라이트 형제가 온 세계를 비행기로 덮게 만들었습니다. 곤충에 미친 사람이 곤충 박사가 되고 음악에 미친 사람은 음악가 그리는 일에 미친 사람은 미술가가 됩니다. 글쓰기에 미친 사람은 작가가 되어 사람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미친 사람이 역사를 끌어간다.><미친 사람이 역사를 흔들어 놓는다.>라고. 오늘 이야기는 미쳤다는 말을 들은 바울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 붙들렸습니다. 독실한 유대교인 바울이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니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황제 네로는 이스라엘 총독으로 베스도를 파송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베스도에게 고소하였습니다. 바울은 총독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확신에 차서최고 통치자에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바울이 베스도에게도 전도하면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라고 설명할 때 베스도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

베스도는 로마인으로서 이스라엘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단다고 하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미친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로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대답하였습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5)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 줄 알았습니다. 베스도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바울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5;12-13) 미쳤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해냅니다. 무엇에 미치면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미쳐야 그 일을 끌고 나갑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든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오직 예수를 외쳤습니다. 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런 소리만 하고 다녔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교회였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이와 길에서 부딪쳤습니다. 물동이의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들어 있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속에는 복음만 들어 있었기에 건드리기만 하면 복음이 흘러 나왔습니다. 당시 기독교 역사를 끌고 간 이가 바울입니다. 복음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 바울 한 명이 터키, 그리스, 로마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고린도, 아덴, 빌립보, 마케도니아, 두아디라, 사데, 에베소 모든 큰 도시를 다 흔들어 놓았습니다. 미친 사람이 역사를 끌고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미칠 수가 있을 가요? 미치고 싶어서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미치게 됩니다. 바울은 본래 유대교에 충실하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죽일 정도로 예수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데 동참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다메섹으로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다메섹까지 쫓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몇 명이 예수 믿는 사람들 체포 결사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예수 믿기 전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이들은 같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쏟아졌습니다.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빛이었습니다.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내가 너를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자도 사용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이 멀었습니다. 더듬거렸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빛은 보지 못 하였습니다. 옆 사람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인 데 보지 못 하였습니다. 신비입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수수께끼입니다. 그 후 바울은 복음에 미쳐서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그렇습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 신을 벗어라.> 신을 벗었습니다.

<내 백성을 애급 종살이에서 해방시켜라. 내가 지금부터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모세는 그 후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데 미친 듯이 일하였습니다.

 

요나도 그렇습니다.

앗수르는 당시 이스라엘 원수국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앗수르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렬한 부르심이 있었기에 니느웨에 가서 미친듯이 40일동안 외쳤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얼마나 놀라운 용기입니다. 미친 사람같이 전도하였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듣게 할 때 이를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 도다.”고 하였습니다. 성경계시에 의한 기독교 복음의 신비는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이나 이성적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때 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을 수용하지 못했으며(요 1:11), 그의 하시는 일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마 12:24).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행 2:13).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기독교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오해하거나 이를 증거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곤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구금되어 있던 바울이 그곳에 온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 나와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가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을 듣고 있던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헤롯 아그립바에게 당신은 선지자를 믿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구금당한 신분으로 심문을 받고 있지만 그는 왕과 총독 앞에서 자신 있는 모습으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모두 다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를 미쳤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미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여 보시오

 

Ⅰ. 경험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그는 지금 자기가 그곳에 서게 되기까지의 모든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와 베니게가 위의를 갖추고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이 좌중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행 25:23), 바울의 진술을 듣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진술에는 힘이 있었고 단번에 심문자와 청중을 제압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겪어 나온 생생한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1) 박해자의 경력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중심에 서서 조직적으로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6:9-12에 보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 온갖 박해를 가하며 기독교 타도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으로 행동의 규범을 삼았습니다(9절). 대제사장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10절).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스데반을 죽일 때는 가편 투표를 했습니다(행 22:20). 회당에서 여러 번 성도들에게 형벌을 가했고 모독을 주었습니다(11절). 그것도 모자라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은 외국에까지 찾아가서 박해를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예수 믿기 이전에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서 숨김없이 드러내고 실토하는 것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하거나 무용담(武勇談)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어리석은 과오를 회개하는 뜻이며 그런 사람을 변화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반증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12절에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에게 붙들리게 된 경위를 밝혀 줍니다. 13절에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정오에 비취는 해 보다 더 밝은 빛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줄 그는 몰랐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9). 14절에 “우리가 다 땅에 엎드려지매 내가 소리를 들이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엉겁결에 “주여 뉘시니이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과거 그토록 원수 시 하고 핍박하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그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됩니다. 성도에게는 이와 같은 중생의 체험과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3) 전도자로서의 경험

 

예수님의 명령대로 다메섹에 들어간 바울은 거기서 선지자 아나니아를 만났고 그에게서 안수를 받은 다음 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행 9:17-18). 그때부터 바울은 성령에 이끌려 각 회당에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행 9:20).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박해를 가해온 그 사람이 오히려 예수를 증거 하는 자로 나서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거나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효과는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일로 인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탈출하였습니다(행 9:25).

 

Ⅱ. 확신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이런 진술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3:6에 보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8에도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피력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베스도의 명에 따라 심문 받는 형식을 빌어 왕과 총독에게 그의 신앙 내용을 소개 하므로써 전도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사도행전 26:6에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이란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로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4:25). 7절에 보면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라고 하였습니다. 곧 유대인들은 저희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써 메시야의 축복을 저들의 전유물로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동정녀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로마서 1:3-4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오늘 말씀 23절에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것과 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사 생명의 주님이 되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케리그마(kerygma)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제자들로부터 역대의 모든 전도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하였다는 것과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요 영생의 실증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설교하기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행 5:30-31).

 

(3) 영광스러운 소망

 

복음의 결과는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행 26:7).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게 되는 기업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4에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영광스러운 기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받은 특권을 알고 있었습니다(롬 8:17-18).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었고(행 19:11),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죽음의 위기로 몰렸을 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는 장면을 체험하였습니다(행 16:25-31).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했습니다(엡 6:20).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와 동행을 하시면서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순발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확신에 찬 간증을 하였습니다(빌 4:13).

 

 

3.바울의 미친 것 같은 열정을 보면 어떤 사람이라 느껴집니까?

 

바울의 설교를 듣고 나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하고 소리 지른 베스도나 아그립바의 경우 바울이 경험하고 확신하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미치광이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그냥 유대인의 율법에 정통한 랍비요 높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증거 하는 그 내용은 베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신령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8).

 

(1) 환상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환상이 있습니다.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신비의 환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변화산 위에서 광채 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곳에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마 17:1-5). 바울은 셋째하늘의 체험을 가졌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때 그가 보고 들은 그 상황을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상태요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1-4).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환상과 그 싸인(sign)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처음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도(행 13:2),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갈 때도(행 16:8), 그리고 폭도들에게 둘러 싸여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자기 곁에 서신 주님을 보았고(행 18:9), 그때마다 저에게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북돋아 주었습니다(행 23:11, 27:23). 그는 훗날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1:18-19).

 

(2) 삶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에 대한 가치관의 기준이 정확합니다. 거기에 따라서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사생관도 분명합니다. 로마서 1:1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롬 1:4). 빌립보서 3:12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리스도 예수만 바라보고 그 길을 달려간 사람입니다(딤후 4:7-8). 바울의 경우 예수를 알고 나서 그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 지워버렸습니다. 빌립보서 3:7-8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요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에게 미쳐있는 바울에게는 베스도나 아그립바의 지위가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로마의 황제를 향하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16).

 

(3)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꿈을 가득 꾸고 있습니다.

 

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베스도에게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잠시 후 “네가 짧은 시간(*적은 말로)에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서도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속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복음전도의 열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이후로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당시의 세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분봉 왕 헤롯 아그립바와 총독 베스도에게 뿐만 아니라 가이사 황제에게까지 복음을 가지고 도전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사람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그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열망이자 사명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사명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보다 더한 모욕을 받더라도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의 열매가 맺어진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상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빌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