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과 2013년 5월 17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다.

사도행전21장1절~16절

작가 에도슈샤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선교사였던 페라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에 접한 포르투칼의 예수회에서 다시 세바스챤 로드리코 신부를 몰래 일본에 잠입시킵니다. 삼엄한 단속과 엄청난 박해 속에서 결국 로드리코 신부도 일본에 상륙한 지 한 달여 만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체포되면서 “결코 배교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교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로드리코는 이미 일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이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뜨거운 열탕에 며칠이고 빠뜨린다든지, 귓불에 구멍을 뚫어 거꾸로 매어 단다든지 하는 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드리코는 순교를 다짐하고 밤을 지새우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밤새도록 고문당하는 신도들의 신음 소리만 듣게 되었습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로드리코 신부에게 속삭입니다. “너도 배교해라. 만일 네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저렇게 죽어갈 것이다” 그래도 로드리코 신부가 배교를 하지 않자 고문하던 사람이 한 수 더 떠 얘기했습니다. “그래 너는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하자. 네가 배교를 한다면 저 사람들이 놓여 날 수가 있는데, 너는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고통 속에 있는 저들의 비명 소리를 외면한다는 말이냐?” 저는 여기서 「침묵」이라는 소설의 이야기를 계속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로드리코 신부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합니다. 로드리코는 그토록 많은 신도들이 신앙을 위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배교한 신도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배교를 함으로써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길인가? 를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간혹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 되지 않아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시지요? 오늘 말씀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의3차전도 여행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바울은 이 당시 제3차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기에 바울은 매일 배로 힘든 항해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스는 비옥한 작은 섬으로 의사가 될 때 누구나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Hoppocratic Oath)”로 우리에게 알려진 의사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으로 큰 규모의 의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도는 섬 이름도 로도이고 그 섬의 항구 이름도 로도인데 장미가 많이 나서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바다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오랜 항구도시로 대표적 이교(異敎)도시요, 번영과 부패의 표본으로 성경에 시돈과 함께 늘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⑴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 작별의 의미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간곡한 고별 설교로 권면을 마친 후 작별합니다. 여기서 작별하고의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는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와 ‘끌다’, ‘당기다’의 뜻은 ‘스파오(σπαω)’의 합성어로 ‘찢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것을 억지로 떼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불확실했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접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역시 바울의 이 힘든 여정을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 작별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바울은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매일 매일 여정을 강행합니다. 밀레도에서 고스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로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배타고 계속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⑵ ‘제자들을 찾아’ -제자들을 찾는 의미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오랜 항구도시 두로에서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해 배가 항구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바울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믿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두로에 있는 제자들과 약속해서 만난 것 같지는 않고 어디에 있든지 전도하고 양육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바울은 배가 머무는 동안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찾아내어 평소대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는데 어디를 가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에 예수 믿는 사람 많이 있는데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면 뭔가 속으로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행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 만나면 뭔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 하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그냥 왔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에 배의 형편이 좋지 않아 할 수 없이 두로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에서도 바울은 쉬지 않고 말씀 가르치고 기도하며 양육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지켜보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는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딴 재미보다 사람 키우는 일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제구실하는 사람으로 잘 이끌어 주는 일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⑶ 바울과 제자들의 작별

 

“5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할 때도 무릎꿇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로 서서 기도했는데 왜 무릎꿇고 기도 했을까요? 의식화한 기도 보다 더 절실한 기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마음 역시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을 위해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었겠습니까?

 

 

2.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보인 바울의 태도는?

 

“7두로로부터 수로(水路)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샤라에 이르러 일곱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두로에서 가이샤라 방면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가 돌레마이입니다. 돌레마이에서 가이샤라까지 육로로 갔는지 배로 갔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배로 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이샤라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지점에 위치한, 로마치하에서 유대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도시로 거대한 항구도시이기도 합니다. 가이샤라에서 바울은 일곱 집사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하게 됩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최초로 전도했던 사람아닙니까? 그에게 딸 넷이 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v8) 했습니다. 여기서 처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지요. 이 당시 대부분 교회 봉사를 과부들이 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지금은 예언 은사가진 사람들이 드물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언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처럼 떠 받들려고 하는 부패된 호기심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한 가정에 전도하는 아버지와 예언하는 딸이 있으니 얼마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 목회자가 되었든, 평신도가 되었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정과 후손을 축복해 주십니다.

 

⑴ 아가보의 예언과 의미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바울이 빌립의 집에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까닭에 심신이 피곤했기도 했고,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도 있었기에 휴식을 겸해서 빌립의 집에 머물며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선지자 아가보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사도행전 11:28에서 온 세계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던 예언자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된다’고 예언합니다. 아가보는 자기의 손과 발을 바울의 허리 띠로 묶으면서 이 허리따의 주인이 이처럼 될 것이라고 실연(實演)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 자신도 밀레도 교회의 장로들에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⑵ 가지 말아라 – 생명을 지켜라

 

아가보의 예언을 전해들은 바울 일행과 가이샤라에 있던 성도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현지의 성도들과 바울을 수행 중이던 사람들이 합세하여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권하다’는 말은 표준 새번역에서는 ‘간곡하게 만류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두로에 있던 성도들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말렸습니다. 가이샤라에 오니 선지자 아가보가 실제 연기까지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면 만나게 될 체포사건에 대하여 보여주면서 모두들 만류하고 있습니다.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만일 바울이었다면 가야 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주위에서 모두들 만류하니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앉겠습니까? 예루살렘에 가기만 하면 붙잡혀 감옥에 넣어지는 것은 물론 생명까지 어찌 될른지 모르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단순히 ‘가지 말라’ 한 마디만 했겠습니까?

 

만일 붙잡혀 감옥간다면 복음 전하는 것도 끝장 아닙니까? 바울 사도여 당신은 아직 더 일하셔야 합니다. 로마에도 가셔야 하고 스페인도 가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직접 로마로 가십시다.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여 고집 고만 좀 부리세요.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다고 당신이 평안한 내일을 살려고 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당신도 예루살렘에 가지 말아야 해요. 가서 붙잡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않아요.

 

사도 바울도 갈등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 뜻일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어느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 예루살렘에 가서 투옥 되는 것이냐? 아니면 비켜 가는 것이냐? 누구인들 스스로 감옥 가는 것 원할 사람 있겠어요? 제 발로 가는 것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선 생명을 지켜야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⑶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 사명이다.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간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사명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체포는 물론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명 내가 꼭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백한 말이 있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생명을 위하여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전하는 사명은 꼭 감당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바울이라고 생명 귀한 줄 몰랐겠습니까? 예루살렘 가지 않는다고 주의 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 가서 복음 전한다고 주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주의 뜻으로 믿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서 네 몸으로 나실 것이라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 사내도 알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겠습니까? 반문하자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보세요. 아무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정혼한 남자가 있는데 결혼 전에 처녀가 정혼한 남자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낳는다는 일 – 얼마나 수치스럽고 곤욕스런 일입니까? 그래도 마리아는 말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개인적으로는 곤욕스럽긴 해도 하나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입장이 난처하고 형편이 곤욕스러워도 하나님 뜻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존심이 믿음보다 강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게 믿음을 던져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내 자존심이 좀 구겨져도, 내가 환난을 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인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 이루려면 환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환난 당합니까? 역경이 있습니까? 문제는 내가 믿음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왜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생명보다 사명을 귀히 여겼던 사도 바울에게서 귀한 믿음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일 매일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우리 중에 한가하게 사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그 바쁨이 주님 주신 사명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평생 아침부터 밤까지 나 하나, 내 가족 하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바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평생 예수 믿을 텐데, 언제인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지나온 삶을 결산할 때가 분명히 올 터 인데, ‘너는 내 가 준 생명, 내가 준 인생,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 삶을 통해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 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한 목숨 언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 이것만 이룬다면 미련이 없다는 바로 그 사명 –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사명(mission)이 무엇입니까? – 평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며 살겠다. 남에게 사랑하며 베풀며 살겠다.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겠다. 한 곳이라도 내 손으로 가꾸며 살겠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며 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 사랑 느끼게 하며 살겠다. 사명을 다 하려면 손해 볼 수도 있어요. 신변에 불이익, 위험이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명이기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직도 그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 ‘평생 이것이 사명이다’ 가슴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세요. 새벽기도하세요. 이것 모르면 평생 믿었다 해도 빈 그릇 가지고 하나님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사명 위해 기도하고 바울처럼 목숨까지는 못 받치더라도 최선을 다 한다면 내 인생이 달라지고 가정과 직장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교회의 일거리가 내 눈에 보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을 앞세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3.바울의 결단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 하게 됩니까?

 

“15이 여러날 후에 행장(行裝))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새 16가이샤라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요즈음은 100km정도는 한 시간이면 갈 수가 있겠지만 당시의 도로 사정이나 교통수단을 생각하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전할 구제금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말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16절의 나손은 바나바와 같은 고향 구브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큰 집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생명이냐? 사명이냐?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 무엇입니까? 사명을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답답한 삶입니다. 죄송하지만 멍청한 삶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이 사명이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사명 위해 때로 신변의 불이익과 손해가 온다 해도, 환난과 곤욕스러움이 온다 해도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