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2월27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로마서 5장12절~21절

 

우리 기독교 역사 속에, 또 믿음의 전통과 믿음의 영적 거장들이 늘 붙잡았던 주제가 바로 ‘회심’이었습니다. 회심은 과거의 죄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출발 지점이 되고, 죄에 대한 심각한 통회와 각성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이 BC와 AD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무언가 바뀌는 인생의 전환점가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바뀌는 회심의 경험은 구원의 사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교회에 잘 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과 회심의 문제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회심의 분명한 경험이 있지 않으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중요합니다. 회심의 사건은 구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과 신앙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헌신, 봉사, 선교는 자기 열심과 사회적 위치에서 하는 연약한 노력일 뿐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큰 뼈대 속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이 표현이 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어떤 환란과 유혹이 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구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근거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말씀12절~14절을 보면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특히 12절은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이 왜 죽게 되었으며, 왜 세상이 이처럼 불행하고 파괴되었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사람으로 인하여 들어 온 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해 창조 된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만 살 때 자유가 보장되고 생명을 유지 할 수 있고 평화를 유지 할 있게 창조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불 순종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생명을 유지하는데 고통스럽고 힘든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함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분은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나까지 죽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이 곧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되었고 그 모든 사람 강둔데 내가 있다는 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안 죽도록 영생의 몸으로 만드셨는데 불순종할 때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아담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나이가 많아 죽지만, 죽는 사연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여도 결국 하나님 말씀 불순종으로 인한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 영원한 형벌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대목입니다. 아담과 우리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입니다. 아담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불리며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대표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류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또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마지막 아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첫 아담에 대한 얘기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구원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우리도 동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온 후로 우리는 죄를 짓기도 전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작용됨으로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나 아프리카인의 죄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같습니다. 서구사람이나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나 무학자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모두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는 모두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일어나는 모든 죄악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복사판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모양이 다를 뿐, 어디에서나 창궐하는 것을 봅니다.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바꾸면 사람들이 선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죄는 다른 모습으로 변질될 뿐이지 약화되지 않으며 형태만 바뀔 뿐 반복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인간이 고통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서 인류는 동일하기 때문에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로마서에서 선포합니다. 죄를 짓는 형태, 도구,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죄의 성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범죄를 폭력적, 엽기적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고대사회에서도 엽기적인 죄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혈육의 살인극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악한 죄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숨어있는 죄 성의 단면이 어떤 사건을 통해 그 사람에게 드러났을 뿐이지 우리 안에도 그 악의 단면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깊고 광범위하게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삶을 파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숨어있는 죄 성이 어떤 환경에 처할 때 죄의 힘이 강하게 작동하게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치명적인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전이나 현재나 죄악의 힘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고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데에는 그렇게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악한 습관도 금방 자리를 잡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죄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굉장히 적극적인 친화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철저히 악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의 문제는 우주적입니다. 죄는 인류에게 미치는 어떤 강한 악성 전염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가져온 폐해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저주와 고통이 여기에서부터 흘러온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에 사망이 찾아오고 고통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존재에 대해서 부인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 찾아온 죽음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비극에 관해서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명공학이 발달을 해도 죄로부터 온 고통과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거둬낼 수는 없습니다. 왜 불행을 원하지 않는데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 이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리 사회학적, 심리학적으로 접근을 해도 답이 없습니다. 영원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명공학이 발달해서 120년까지 산다고 하고, 실제로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3세까지 살았습니다. 최근의 뉴스위크지를 보면 150세까지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얼마 있지 않아서 암이 정복되고 우리의 신체 장기들이 낡으면 갈아 끼우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죄로부터 온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또 죄의 문제로 인해 깨어진 삶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의 관점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굉장히 종합적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은 한번 죽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아무것도 없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예수를 믿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죄는 우리를 많이 망가지게 했습니다. 망가져도 너무 많이 망가지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죄 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 찾아온 수많은 어려움들을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을 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한 사람으로 인하여’ 찾아온 사망과 저주가 그 한 사람으로 온 것과 같이 또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 생명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을 대조하면서 앞의 한 사람은 아담이라는 인류의 대표이고 또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마침내 모두가 죄를 짓게 된 것을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한 사람을 통해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왕 노릇했다는 말은 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 죄의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뒤덮고 있다는 죄의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마치 내가 한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일합방을 했을 때 내가 직접 하지 않았지만, 대표가 조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가 식민지 생활을 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노아가 낮에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을 때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 저주를 받게 되는데 그 후손까지 저주를 받습니다. 그 안에 대표의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고 그것으로 인해 미친 범죄의 결과를 우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그 원리 안에서 한 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아담의 대표 원리를 거부하고 부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동시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해야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에도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순종에 있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마태복음 26장 38절~39절)”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하여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죄가 해결된 효과가 나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이 대표의 원리가 너무도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고 또 한 사람으로 인해 생명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저주와 죄가 왔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로 결론 맺고 끝이 났다면 인류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담 안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이 우리에게 시작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아담 이후에 죽음이라는 문제, 사망의 권세는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이고 온 인류를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는 잔인한 폭군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돈이나 건강이 빼앗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큰 상실은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저주 중의 저주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에 찾아올 영원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계보에서 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여기에는 돈도 권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생명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생명의 힘이 역사하게 됨으로 이 생명의 힘 앞에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예수 안에서 생명의 꽃이 피어오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이 구원의 사건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사건을 정확하게 경험한 사람은 속에 불이 날 정도로 뒤집어집니다. 구원의 감격을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여기에서 생명의 왕 노릇은 이 세상의 죄로부터 주어진 사망의 지배, 죽음의 굴레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나의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더 이상 저주는 사라지고 영원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자도 암에 걸리고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이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 아래 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죽음의 형벌과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 접속되어 죽고 사는 문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요즘 적조 현상으로 바다의 물고기떼들이 몰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니까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없고 흙을 붓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죽음의 힘이 임하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이때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면 한순간에 해결이 됩니다. 17절에 ‘더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흘렀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힘이 흘러 모든 인류를 쥐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압도적으로 역사하여 생명의 힘이 발동함으로 모든 저주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당하고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압도하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어닥칠 때 아무도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것 같이 저주와 절망과 사망의 권세,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는 감격적인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율법이 있기 전에는 우리가 죄를 죄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인해 우리 죄를 깊이 인식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절망할 수 없는 것은 그 죄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망을 삼켜 소화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쳐 우리 죄를 덮고도 남고, 그 죄로 인한 결과들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 잠겨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누리자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누리는 것입니다.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 5:2~3)」 은혜에 들어감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의 풍성함 안에 있는 것이고, 더 이상 우리 삶에 어떤 고통도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에게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지금까지 사망의 권세 앞에 꼼짝 못 해 사망이 쏘면 모두가 쓰러졌지만 이제는 예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사망의 화살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흥분이 됩니다.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절대 폭군이었던 죽음도 꼼짝 못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생명이 흘러넘치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확인하면 우리는 절대로 비관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던 첫 사람 아담의 뒤에 더 이상 서 있지 말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뒤에 줄을 서서 생명과 은혜의 풍성함 안에 들어가 날마다 승리를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고,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죽고, 죽고’의 계보와는 다르게 ‘낳고, 낳고, 낳고’ 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강력한 역사 안에서 구원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장엄함, 풍성함을 알아갈수록 우리 삶에 활기와 감격과 당당함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수많은 절망 가운데에서도 위축되거나 우울할 일이 없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승리했다면 더 이상 위험한 것도 없고 불행한 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위기와 환란 중에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불사조처럼 날마다 일어나게 했던 것은 예수의 생명 안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의 파워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승리를 경험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계속 역사함으로 사망의 권세 아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 앞에서 사망의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라고 선포하는, 구별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