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2월13일 구원받은 자의 기쁨
로마서5장 1절 ~ 5절

예전에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큰 액수의 돈을 꺼내 한 학생에게 내밀면서 “네가 이것을 가지고 싶다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선생님이 농담하는 줄 알고 싱글싱글 웃기만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한 학생에게 시계를 내밀며 “네가 원하면 이것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아이도 받지 않고 웃기만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선생님이 장난으로 그러시는데 받았다가 웃음거리가 될까봐 걱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돈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그 아이가 돈을 받았다고 막 웃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기뻐하시면서 “너는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고맙다. 이 돈은 네 것이니 잘 쓰 거라 고 돈을 주셨습니다. 그제야 학생들은 “선생님, 정말 주시는 겁니까? 아주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다고 하자 모든 학생들은 무척 아쉬워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설명하는 적절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쉬운 방법이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고 공로를 쌓아야 구원받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에게는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실 아들까지 내어 주셨는데 선물인들 못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받지 못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 5장만 가지고 26시간 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책 한 권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로마서 5장 1∼11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강해하는데 14시간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여기처럼 구원받은 성도의 기쁨이 넘쳐나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1.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화평을 설명하시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하나님의 선물은 화평입니다. 샬롬 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은 과거시제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누리자”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화평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있는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화평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십시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평화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니 모든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도 불신앙 입니다. 천주교회는 이상한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밖에 나가 울며 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의 이야기는 베드로가 닭만 울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닭만 울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수십 년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의 이야기는 쉼 없이 성결과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의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믿고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계속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낳고 팽개쳐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니지요, 계속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셨지요.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닌가봐, 우리 엄마는 친엄마가 아닌가봐.”하면서 아들, 딸로서의 신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이 또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화를 자녀들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사람이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벌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벌면 벌수록 더욱 목말라지고 공허해집니다. 세상의 것들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타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또 어떤 이는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족이 없습니다. 반장이 되면 회장하고 싶습니다. 시의원이 되면 국회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있습니까? 국회의원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고 대통령이 되면 두 번 하고 싶고 평생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을 추구하고 높아지고자 하 지만 오를수록 더 목말라지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지 않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이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새 옷을 주셨는데 걸어 놓고 구경만 하겠습니까? 아무리 있어도 누리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80년 전에 미국의 최대 구두쇠는 히티 그린이라는 노파였습니다. 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이 다리에 병이 났는데 치료를 미루다가 다리를 잘라내고 한평생 절뚝거리며 살았습니다. 그 노파는 죽을 때까지 묽은 죽으로 연명하였습니다. 돌아가실 때 병명이 영양실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저금통장을 보니까 1억불이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노파와 같습니다. 엄청난 은혜와 평화를 주셨는데도 누리지 못한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누리게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가슴을 펴고 큰 이상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만왕의 왕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믿고 화평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2.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입니다. 옛날 성소에는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경계선을 넘는 이방인은 사형을 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 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은혜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즐기고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자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마음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언제든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의 특권입니다. 이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 성전의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허리에는 긴 끈을 묶고 옷에는 방울을 달았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범죄 함으로 죽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알고 줄을 잡아 당겨 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에 들어감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비서를 통할 필요도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목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천주교의 교회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듯, 한 마디 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면 비서를 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개신교 목사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자녀들이야 비서관을 거치지 않고서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누리는 것 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직접 교제를 즐기십시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누리십시오. 자녀가 부모에게 직접 간구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간구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녀의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취급해 주시고 자녀에게 하듯 응답해 주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십시오.

3.소망을 누리게 됨을 설명하시오

끝으로 소망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세 번째 선물은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 둘레에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만난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한탄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의지할 부모형제도 없습니다. 특별한 기술도 없습니다. 입에 간신히 풀칠할 정도로 벌어먹고 삽니다. 아직 결혼도 못했습니다. 정말 답답한 형편입니다. 스스로 소망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소망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믿으려 하지 않고 그저 절망 가운데 있기를 자청 합니다. 구원이란 주안에 있으면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이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에는 이 땅의 소망도 있고 천국의 소망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하시며 복 주시겠다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저는 소망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중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으나 그것이 반드시 끝은 아닙니다. 인생은 죽어 그 영혼이 영원한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평생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고 천국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소망을 누리는 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3∼4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하노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 저 너머의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환난만 보지 않고 환난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당하여 인내하는 자들에게 연단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환난을 환난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환난이 소망을 이루는 기회가 됩니다.

환난을 당하여도 즐거워하십시오.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휴포모네)는 불굴의 정신을 뜻합니다. 단순히 참는 것을 뜻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겨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 중에 참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면 저 앞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참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력이 환난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젊어서 고생을 사서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은 너무 나약합니다. 그리고 보호 속에 나약하게 자란 아이들은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어려움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인내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여도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연단(도키메)은 쇠가 불 속에서 제련되어 단단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쇠를 불 속에 넣었다가 달구어지면 꺼내서 두드립니다. 자꾸만 때려서 강한 쇠를 만드는 것입니다. 쇠 속에도 여러 분자들이 있는데 자꾸만 때리면 분자 사이의 간격이 좁혀져서 강한 쇠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강한 믿음이 됩니다. 이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그리고 연단이 소망을 이룹니다. 진정한 소망은 연단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어려움과 연단을 통하여 사람들의 소망이 고상해집니다.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소망입니다. 물질적인 소망, 육신적인 소망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연단을 통한 소망은 이러한 세속적 소망과 구별이 됩니다.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려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마련해 주는 영원한 소망의 기회를 좋아합니다.” 어려움과 연단은 영원한 소망, 고상한 소망, 신령한 소망의 기회가 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시는 소망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환난을 당하여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참 소망을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