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1월8일

형식적인 신앙을 극복하라
로마서2장17절~29절

오늘 공부 할 말씀은 형식적인 유대인을 공격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면 참 유대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격합니다.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찬송이라는 뜻이지 실제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네가”라고 시작하며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명칭보다는 유대인이라는 명칭이 선호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있습니다. 일찍이 다윗의 무리들은 유대라고 불리었고 사울의 잔존 세력들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쪽은 이스라엘로, 남쪽은 유대로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유대가 이스라엘을 압도했습니다. 유대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칭하는 데 긍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름값을 못하고 있으니 문제였던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으로 모양만 있으니 어찌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책망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독일어 사용권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사순절(四旬節) 이전 3일간 벌이는 축제로 명칭·기간·축제행위는 지역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파싱’, 프랑켄에서는 ‘포스나트’, 스바비아에서는 ‘파스네트’, 마인츠와 그 주변에서는 ‘파스트나흐트’, 쾰른과 라인란트에서는 ‘카르네발’로 알려져 있다. 사순절 예비 절기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공현축일(公顯祝日:1월 6일)로 알려져 있지만, 사육제를 가장 정성스럽게 벌이는 쾰른에서는 공식적인 시작을 11월 11일 11시로 잡는다. 사순절 직전 목요일에도 축제가 벌어질 수 있지만, 사육제와 연관된 본격적인 술과 광란의 축제는 ‘재의 수요일’ 이전 3일 동안 절정에 이르며 참회 화요일에 끝난다. 이 마지막 며칠의 명칭도 지역마다 다르다.

사육제의 정확한 역사적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그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Parzival〉(13세기초)에 언급되어 있다. 이 축제는 특히 마인츠와 슈파이어 등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쾰른에서는 이미 1234년에 정착되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 앞에 오는 축제이기도 했지만, 일상생활의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나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축제에서 바보들의 의회에 도시의 열쇠들을 넘겨주거나 여자를 군주로 앉히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요란한 가장행렬과 대규모 가면무도회, 풍자적·파격적인 연극·연설·신문 칼럼, 광적인 행위들도 이 축제에서 유래했는데,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사육제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가톨릭의 이 무절제한 축제를 금지함으로써 사육제 축제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남미 브라질은 세계의 수많은 문화적 축제 중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축제로 단연 리우 카니발(Rio carnival)이다. 세계를 달구는 이 삼바 축제는 브라질의 여름휴가가 끝날 무렵인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에 나흘 동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열린다. 원래 카니발(Carnival)의 사전적 어원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의미의 카르네 레바레(Carne Levare)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황야에서 금식을 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보낸 기간을 기념해 생긴 금욕기간인 사순절(Lent)이라는 관습을 앞두고 즐기는 축제를 의미한다. 눈가림으로 경건한척 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인간적이다. 예수님과는 도대체 상관이 없는 것이다.

1.무엇이 이스라엘의 자랑거리 입니까?

물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7-20절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 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 진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 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 선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많은 규례를 만들어 가면서 더 잘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 점은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처럼 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의지합니까? 대부분 보면 우리에게 유리한 말씀에는 쉽게 아멘 하면서도 불리한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최고의 신이요,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최고의 신입니다. 그 분은 신중의 신이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저는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즉 성경연구를 열심히 한 결과 많은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였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점이었습니다. 성경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 점도 유대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2. 유대인의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과 우리의 신앙에 유사점은?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을 공격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소용입니까?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진정 훌륭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4장 성경말씀에서 말하는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판단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해 보고 인정받는 참 좋은 예수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합니다. 오늘 공부할 말씀의 21-24절 말씀 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 숭배를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사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기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않느냐?”는 말씀을 남에게 가르치되 자신은 행치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상태는 어떻습니까? 특별히 한국 교회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교인 숫자 늘리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말씀으로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범사에 복을 받고 건강해진다는 말씀을 복음중의 복음처럼 가르쳤습니다. 한 마디로 성공 지향적이고 기복신앙이 판을 쳤습니다.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그런 사탕발림에 많은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25%정도가 교회에 나왔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에는 도둑놈 4명을 잡으면 그 중의 25%가 교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기꾼 4명을 잡아도 그 중의 한 명은 교인이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솝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공중목욕탕에 몇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쪼르르 달려갔다 오더니 한 사람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솝의 아버지는 잘 됐다고 생각하고 목욕탕엘 갔습니다. 그러나 목욕탕 안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간신히 목욕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이솝을 불러 야단쳤습니다. “목욕탕에 사람이 가득 하던데 왜 한 명밖에 없다고 거짓말을 했냐?” 그때 이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보니 목욕탕 앞에 돌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사람마다 그 돌에 걸려서 넘어 질 뻔 하면서도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참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 중에 딱 한 사람이 그 돌을 치우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딱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입니까? 마찬가지로 성도라고 다 성도입니까? 우리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크리스찬은 참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3. 내면적 유대인과 성경말씀으로 심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공격하고 나서 바울은 해결책으로 권면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이면적 유대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 유대 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요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형식적인 크리스찬이 되지 말고 내면적 크리스찬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할례도 형식이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 의식이 생활 속에 열매를 맺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할례도 그렇게 세례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결혼식을 거창하게 올렸습니다.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귀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다르게 합니다. 다른 여자 생각하고 다른 남자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결혼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결혼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딴 생각을 한다면 결혼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활 속에 열매가 없으면 그 예식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식보다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표면적인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육체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 귀의 할례로, 입의 할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 할례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그래야 참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정치도 쇼를 하면 안 되는 법인데 신앙이야 하나님을 향한 것인데 마음 없이 되겠습니까?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선물도 마음이 없으면 뇌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도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형식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인격적으로 심화된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이 들어나는 인격이 될 때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 신앙의 모습을 탈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칭찬 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9절에서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도 칭찬 받아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칭찬은 외모를 보는 칭찬이지만 하나님의 칭찬은 중심을 보시는 칭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으로 심화된 내면적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떨쳐 버리고 중심이 바로 서는 신앙, 마음이 있는 신앙의 자세, 속사람이 성숙하여 삶에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