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성육신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다. 사실, 해수 수족관을 관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질산염 농도와 암모니아의 양을 늘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간편한 화학 실험실까지 갖추어야 했다. 비타민이나 항생제, 설파제 따위를 투입하고, 수족관 바닥 자갈에 붙어 자랄 효소까지도 충분히 넣어 줬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수족관 물 전체를 유리섬유와 숯으로 걸러 낸 다음 자외선으로 살균했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위해 그토록 애를 썼으니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고기들이 최소한 고마워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족관 근처에 내 그림자가 어른 거릴 때마다 고기들은 늘 가까운 조개 껍데기 속으로 숨곤 했다. 고기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만을 표출했다. 하루에 세 차례씩 수족관 덮개를 열고 먹이를 뿌려줄 때조차, 고기들은 나의 행동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신호로만 받아들였다. 나는 고기들에게 나의 진정한 관심을 전달할 수 없었다.
고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신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너무나 컸으며, 나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자비로운 행동을 고기들은 만행으로 여겼다. 내 치유의 손길은 파괴의 마수로 비쳤다. 그래서 나는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고기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이 고기가 되는 화육적 양식이 필요함을. 진정 나는 고기가 되어, 고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 고기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기가 된다는 그 엄청난 현상과 비교할 차원이 못 된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베들레헴에서 그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다. 마치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한 점이 되듯, 마치 극작가가 자신이 쓴 연극대본의 한 등장인물이 되듯. 하나님은 실제 역사의 각 장마다, 오직 실제 배우들을 등장시켜 가며 한 이야기를 쓰셨다. 그리고 말씀이 되셨다.
- 필립 얀시(Philip Yancey),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