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성 요한 크리스소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 단지 10명이 의롭다면 그 10명은 20명이 될 것이고 20명이 50명, 50명이 100명, 100명이 1000명 그리고 1000명이 전체 도시가 될 것이다. 10개의 등불이 밝혀졌을 때 집 전체가 빛으로 가득한 것처럼 영적인 것의 진보도 그러하다. 우리 중 10명이 거룩한 삶을 살면 우리가 전체 도시를 밝힐 수 있는 불을 켜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거룩을 생각할 때는 과거의 거룩한 성자들, 아시시의 프란시스나 조지 뮐러 혹은 현대에는 테레사 수녀와 같은 거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거룩은 순교자들, 신비가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들과 같은 그룹만이 누리는 영역이 아닙니다. 거룩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누려야 할 일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음에도 왜 이런 비참한 일을 만나야 했습니까? 앞의 장면 즉,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 바친 일과 비교해 보며 우리는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의 동기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공명심에서 행동했습니다. 바나바는 주님에게만 전적으로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내일을 걱정했습니다. 탐심과 염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사고로 보면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인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의미는 성령을 속였다는 사실입니다.
바나바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서술하면서, 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길게 서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는 곤란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양과 껍데기는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조지 수위팅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우리는 거룩한 삶을 흉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금방 그 허구성이 탄로 나고 말 것이다. 거룩한 삶은 진실된 것인 반면 그것을 흉내 낸 삶은 거짓이다. 거룩한 삶은 자연스러운 것인 반면 그것을 흉내 낸 삶은 인위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형벌의 가혹함에 있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하려는 성령님의 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엔 거룩에 대한 요구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거룩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21세기 인터넷 선교방송 매일 큐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