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9월27일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롬1장1절~7절

 

오래 전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국경문제로 장기간 분쟁을 계속했습니다. 이 같은 분쟁은 급기야 무서운 유혈사태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1900년 부활절 아침에 아르헨티나의 한 사제가 강론하기를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형제의 우정을 맺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강론을 아르헨티나 전역을 돌며 했을 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칠레에까지 가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력으로 두 나라는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군함은 상선으로 개조되었으며 무기를 만들던 공장은 공업학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국민 사이에는 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합의하여 대포를 녹여서 그리스도의 상을 만들기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1904년 3월 13일에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전에는 적이었으나 이제 두 나라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동상이 제막되고 태양이 질 무렵 두 국민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동상 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구주 예수의 발 밑에서 끝까지 유지하기로 서약한 평화를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깬다면 즉시 이 산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라.” 그리고 사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기념상은 단지 칠레나 아르헨티나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를 위해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세계는 인류에게 미칠 평화에 관해서 큰 교훈을 얻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마을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다리에는 그리스도의 상이 12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상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동들은 지나가면서 선한 목자 그리스도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정원사와 농부들은 씨뿌리는 예수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어부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그리스도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병자들은 치유자이신 그리스도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각각 자신과 연관되는 그리스도 상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오늘 공부할 말씀은 바울의 로마서 중 인사말씀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복음에서 관련된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하여금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령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복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복음은 좋은 소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우리 앞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요한 1서 1장 9절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할렐루야.

그런데 복음은 단순한 희소식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소개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문적인 지식의 발표문도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복음의 주체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이상을 복음의 핵심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부산물입니다. 도덕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 건강문제가 복음의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도덕관이나 경제관은 하나님의 계시의 지엽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요, 그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성경에 미리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2절을 모십시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선지자들의 예신의 주제가 오시는 메시아 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속죄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공포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창작품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아버지 없이 태어난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깨뜨릴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또 창세기 3장 21절에는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의롭다 함을 입을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가는 700여 년 전에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맞아떨어질 확률은 아주 적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확률이 캘리포니아 전역에 100원짜리 동전을 무릎까지 쌓아 놓고 그 중에 하나를 집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은 우연이나 즉흥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우리를 위하여 약속하시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2. 참 하나님, 참 인간이싱 예수 그리스도

3∼4절을 보십시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독론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나 미라이의 몸에서 인성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혈통으로는 다윗의 혈통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오신다고 예언되었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구원자가 나오고 한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결의 영으로는 인간과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물이나 성현 중의 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부활에 의하여 증명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증거이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에 고백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몸을 입어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참 인간이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부활의 증거를 보이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주제는 초대교회 논쟁의 중심이었습니다. 니케아공 의회나 칼케돈 회의가 이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325년 7월 4일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에 전국의 주교, 장로 300여명을 소집하였습니다. 당시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인간보다 위에 있으나 하나님보다는 아래에 있다. 하나님만이 원존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지으셨고 아들은 만물을 지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한 결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동질”이라는 결론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토론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계속되는 기독론 논쟁으로 451년에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받은 아리우스의 사상이 계속 인기 있게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또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약화시켰습니다. 또 시릴같이 양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하여 칼케돈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선언하였습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평강의 주가 되심

주(主)라는 명칭은 예수께 주어진 가장 일반적인 명칭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 높임을 받으심, 그리고 절대 권능을 나타냅니다. 어떠한 이름 앞에 쓰여지는 주라는 명칭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신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주 예수라는 명칭이 분명하게 예수의 신성을 들어내는 것이었다. 반대로 로마의 황제가 자신을 ‘주 시이저’라고 했을 때 이는 자신을 신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주라고 고백하였다.

또 ‘주’라는 명칭은 높임을 받으심을 뜻한다. 예수님은 극본 하나님과 본체시지만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인간과 같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피조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주님으로 영광과 높임을 받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라는 명칭은 그의 절대 주권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을 파멸에서 건져낸 자는 그 건짐을 받은 사람에게 주가 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명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으니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섬기고 경배해야 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주라고 고백함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가장 높은 존재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시시해 보이지만 우리들에게는 가장 귀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으로 우리를 다스릴 분이시며 우리는 그를 있는 힘을 다하여 섬겨야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의 그리스도

7절입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인사말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와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이 이 평강을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의 환경조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접하므로 오는 것인데 영원에 접하므로 오는 평강입니다. 우리 석교 가족 여러분께도 이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끝으로 어떠한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도란 누구일까요?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과 부르심을 받은 것과 연관시켰습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거룩해져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를 분별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 죄인들입니다. 그래도 은혜 안에서 성도가 되었습니다.

헬라어에는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호시오스인데 사실상의 거룩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기오스인데 거룩함을 힘쓴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는 하기오스의 의미에서 성도인데 거룩해서 성도가 아니라 거룩을 힘쓰는, 거룩에 속해 있으므로 성도입니다. 부족한 죄인이지만 주께 속해 있으므로 성도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거룩합니까? 우리는 오직 거룩함에 속해 있을 뿐이지 거룩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주안에 있으므로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주어집니다. 부족하더라도 주께 속해 있으면 됩니다. 성도도 될 수 있고 은혜와 평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 여러분! 이런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