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2 월 1일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사도행전15장36절~41절
오늘 말씀은 참 훌륭한 목회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내용입니다. 그것도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성경은 다퉈서 피차 갈라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다툰 원인은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전에 마가가 바울을 따라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전도 여행 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떠났습니다. 떠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1)향수병을 앓았다. 2)애인이 그리워서 갔다. 3)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서 갔다. 4)베드로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갔다. 5)바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삼촌이 밀리는 것이 싫어서 갔다 는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어쨌든 마가 요한은 도중에 그만 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시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고, 마가의 입장을 변호해 주었지만, 바울은 그런 사람은 같이 일할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데리고 가느냐 둘이 의견이 달라서, 심히 다투다가 갈라서 버렸습니다.
1. 다툼의 원인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항상 모든 것에 일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일 중심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사람을 먼저 배려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일 중심이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입니다. 바나바가 사람 중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는 사도행전9:26-30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변화 된 뒤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지만 바울과 제자들 사이에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이중간첩 정도로 이해하면서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바나바가 적극 변호하고 중재자로 나서서 바울을 구해줍니다. 그 이후에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바울은 다소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기 위해 190km의 긴 여행 끝에 바울을 찾아내고 안디옥으로 데리고 가서 그와 함께 일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1:25-26에 나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울의 출중함을 바나바가 시기한 흔적이 없다는 것과 지도자적 위치를 바울에게 물려주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부터는 지도자가 바나바에서 바울에게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은 일 보다는 일에 연결된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일에 방해가 되는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마가 요한의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2. 의견이 다르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님을 설명합시다.
바울도 싸웠고, 모든 사람이 싸웁니다. 이건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입니다. 그러니 내가 남과 다툼을 일으키고 싸운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 같으면 무슨 재미로 사람 만납니까? 즉, 난 타인과 다르기 때문에, 타인과의 갈등은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대인관계를 시작할 때는 우선 다른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갈등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각자 자기의 성격이 있고, 그것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툼이 있다면, 기왕에 갈등을 겪고 다툼을 하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기술적으로” 다투어야 합니다. 다투더라도 극단은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다투더라도 죄를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을 내지 않으면 좋지만 혹시 분을 내더라도 죄짓는 일은 삼가라는 말입니다. 극단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툼마저도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이분법적인 사고로 구분해서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보다 훨씬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핍박이라는 도구를 쓰십니다. 핍박이 없었으면 아마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결과적으로 어떤 역사를 가져왔습니까? 오늘 말씀 39-41절입니다.“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각기 따로 떨어져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선교 사역의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훗날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15-18)
이 말은 이제 내가 보니 사람들이 다른 뜻으로 갈라지고, 싸우고 해도 결국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서로간의 차이는 대립으로 보지 말고 보완으로 보아야합니다. 서로 대립하는 상대가 아니라 서로 살리는 사이로 보아야 합니다. 대립을 넘어, 상대를 넘어 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갈등을 겪고 대립되는 듯 보이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은 이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함께 한 통속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대립이지만, 깊이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기 위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3. 다툼을 통해 어떻게 성숙 했습니까?.
아픔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지요. 오늘 말씀의 두 사람은 갈등을 통해 균형 잡힌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여러 면에서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일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사람에 대해사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입니다. 바울은 일 때문에 거절했던 마가를 이제는 데리고 오라고 전합니다. 일 중심의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 이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예전의 생각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를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것은, 성경을 보면 그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4:10과 16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을 비난하며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나를 버렸다고만 말합니다. 갈 길이 달랐다는 표현입니다. 자기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용인해 줄만큼 관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여러 가지 아픔을 통해 성숙의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갈등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성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성숙해집니다. 부쩍 키가 커든지 말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갈등을 겪지 않으면 성장이 안 일어납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갈등이 없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나 밖에 모르는데 어디서 성장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배척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 갈등은 기회 입니다. 갈등을 통해 성숙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투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과 겨루기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합니다.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앞길에 놓인 장애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