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5월 24일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사도행전21장17절~26절

 

어느 날 한 사람이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교회마다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왜 이렇게 갈등이 많습니까? 문제없는 교회, 갈등 없는 교회를 저에게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 말에 스펄전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형제여, 이 땅에서 그런 교회를 만나게 되면 내게도 소개해 주시오. 당신이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소. 그러나 만약에 형제가 그런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형제도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마시오. 나도 그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형제나 내가 그 교회에 가는 바로 그때부터 그 교회도 문제와 갈등이 생길 것입니다.”

 

교회에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교회가 부족해서나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인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온통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심각한 것이 종교 간의 갈등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심심찮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전투 장면을 지켜봅니다. 서로 돌을 던지며 충돌하는 작은 갈등에서부터 비행기와 미사일로 폭격하는 큰 충돌까지 두 나라는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도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인도와 파키스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나라 얘기만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도 갈등이 즐비합니다. 특히 정계를 보면 여야 간의 갈등으로 민생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야 간의 갈등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그것도 같은 여권, 같은 야권 안에서도 세력 다툼이 대단합니다. 어느 쪽이 잘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 장래는 참 걱정스럽습니다.

 

나라 뿐 입니까? 집안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갈등, 남편과 아내의 갈등, 형제 자매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교회 안에서도 성도간의 갈등, 성도와 교역자간의 갈등-이런 저런 갈등으로 머리가 아프고 장래가 걱정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때 일수록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 26:3-4에서 말합니다.

 

“3주께서 심지(心地)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 이니 이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 이로다”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린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평강이 있다는 말씀아 닙니까? 믿음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고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의 뿌리를 세상에 둔 사람은 언제나 흔들리며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갈등하고, 분노하고, 화내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평안을 눌리시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드디어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자기 생애에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가 중심 지도자였습니다. 감독이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온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부터, 특별히 유대인 성도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1. 바울은 어떻게 선교보고를 하였습니까?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지금가지 자신이 했던 선교 보고를 합니다. 바울의 선교보고는 내용이나 양에 있어서 대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바울의 선교 내용은 한 절에 딱 두 가지 관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 내용의 주어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갖은 고초와 죽음의 위협을 견뎌내고 이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희생과 노력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수많은 이방인을 구원해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어떻게 복음은 전파했는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방인을 구원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신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생각, 이 믿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도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쓰임 받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만약 중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변질되었다면 스스로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고린도 전서 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된 것은 누구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 이 믿음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할 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신앙은 언제나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신앙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는 순간 신앙은 변질되는 것입니다. 사람 냄새가 나면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헌금도, 전도도, 하나님께서 전면에 드러나셔야지 내가 드러나면 벌써 신앙의 길에서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증거되고 있는지 내가 드러나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⑵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의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존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수련했으며, 종교적 열심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교보고에서 자신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도구에 불과한데 뭐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도자기라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뽑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든 사람이 대단하지 도자기가 대단합니까? 토기장이 손에 들려진 진흙이 무엇은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울의 선교 보고는 이방인 구원 사역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한 것 같고, 그 때에는 내가 수고한 것 같지만 지난 후에 돌아보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자녀 여러분이 다 키우셨어요? 저의 애들보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키우셨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별로 해 준 것이 없어요. 급한 성격에 소리만 질렀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보고를 하는 바울이나 보고를 듣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과장하지도 않고 가볍게 업신여기지도 않고 그저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 일 해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압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힘이 들고 남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힘듭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립시다. 내 자신은 자랑하지도 말고, 남을 비난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합시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2. 바울의 선교보고 가운데 변질된 신앙은?

 

“20b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規模)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긴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개종한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비록 개종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이방선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널리 전했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이방인에게는 믿음의 차원에서 율법과 할례를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수단이 아님을 강조해 왔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 정도일 뿐이지 율법은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사상에 우려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과격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하려는 계획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함으로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율법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허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과 같은 경우 학자들은 마태복음 안에 크게 다섯 묶음의 설교가 편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세력을 얻고 있던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 마태복음안에 있는 다섯 묶음의 설교를 보며 아마도 모세 오경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윤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설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 역시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이 시내 산 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신학적 의도가 어찌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에 개종한 유대인들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 역시 이러한 개종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기키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용납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 아닙니까?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 오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께서 뭐라하셨습니까? “오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 갔어요.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갑자기 무서움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처음에 주님만 보고 주님 말씀대로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주위를 보니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주님 대신 거센 바람에 몰아치는 물결이 보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 빠졌습니다. 주님만 보면 괜찮아요. 하나님만 보면 괜찮아요. 그런데 주위를 봐요. 상황을 너무 많이 생각해요. 풍덩 빠졌어요.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불같은 성령 받고 시작되었습니다. 분명하지요? 성령강림 사건이 바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도록 확증해준 사건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 안에서 출신과 족속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경험에서 율법을 뛰어 넘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율법을 들먹입니까? 어쩌자고 복음보다 율법을 크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변질입니다. 신앙의 변질입니다.

 

오늘날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초대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배우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나누는 일에 온 힘을 기우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마다, 교단마다 교권에 힘을 쏟습니다. 제도가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처음 영접했을 때의 감격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뜨거움과 사랑이 아직도 있습니까? 처음에는 순수하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 지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데 아무개는 저렇게 신앙생활 해? 장로 권사가 새벽기도도 안 나와?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무엇을 기뻐하실까? 이것이 참다운 신앙생활 아닙니까?

3.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어떤 제안을 받아드렸습니까?

 

“22그러면 어찌 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 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와 격한 감정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한 가지 바울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택하여 결례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바울에게 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히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에 대해 바울은 곧 실천에 옮깁니다.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이튿날 결례를 행합니다. (결례란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보통 한 달 간 하는데 마지막 일주일은 성전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생활을 합니다. 기간이 차면 제물을 드리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결례 비용 부담하는 것을 신앙의 덕으로 여겼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해서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한 바울이 결례를 행했다는 것은 이방선교는 인정하면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율법으로 회귀한 것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과 타협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고전 9:19-22)”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타협이 아니라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맞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전도한다는 것 아닙니까? 왜? 구원하려고. 바울의 단한가지 목적이 있다면 영혼구원이요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 이렇게 목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쓰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만입니까?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닙니까? 자녀교육, 사업, 직장생활,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 바울처럼 열심히 전도합시다. 기도하세요. 사랑하세요. 예수 전하세요. 전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고 전도하세요. 지옥 가는 것 보고만 계시렵니까? 열심히 전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