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5월 10일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급히 가다.
사도행전20장13절~35절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밀레도에 이르러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눈물로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3절로 15절까지는 드로아에서부터 밀레도까지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32km. 바울은 도보로 갔습니다. 앗소에서 배타고 레스보스 섬의 수도인 미둘레네까지 71km 이후 밀레도까지 계속 배를 타고 갔습니다. 미둘레네에서 다음날 기오 섬으로 다음 날에는 에베소에 근접해 있는 사모 섬으로 그 다음날에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48km 지점에 있는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1. 바울은 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까?
13절에서부터 15절까지 말씀에는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바울의 여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13-16) 이 여정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34km 거리입니다. 이 거리를 일행은 배를 타고 갔으나, 바울은 홀로 육로로 걸어서 갔습니다. 도중에 어떤 사람들을 심방하기 위함이었다는 해석과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습니다.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한 바울은 미둘레네까지 배로 갔습니다. 미둘레네는 레스보스 섬의 수도로 앗소에서 서남쪽으로 약50km지점에 있습니다. 미둘레네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약80km 떨어진 기오 섬에 기착했고, 다시 기오를 출발하여 약80km 떨어진 사모에 도착했습니다. 사모는 에베소 맞은편에 있는 인구가 조밀한 섬으로, 유명한 피타고라스와 이이솝의 출생지입니다. 사모를 출발하여 하루만에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약 5일이 걸렸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약300km가 넘습니다.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17) 바울이 에베소로 가지 않고 사람들을 오라고 한 한 이유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16) 본래는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었지만 늦어지는 바람에 오순절에 맞춰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맞춰 가는 것도 빠듯하여 부득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초청한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한 이야기는?
바울이 초청한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급 인사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특별한 목회적 부탁을 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행한 교훈, 18-35절까지의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게 주는 만고불변의 목회 지침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목회자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얘기합니다. 삶 자체보다 더 좋은 교훈은 없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바니,”(18) 19절에서 35절까지의 교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19-21절)은 바울이 걸어온 길, 두 번째 부분(22-27)은 바울 앞에 놓인 당면 과제, 세 번째 부분(28-35절)은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부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어떻게 목회를 했는가?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로, 주를 섬기는 것, 둘째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침으로 섬기는 것, 셋째로, 가르침의 핵심인 회개와 믿음 등입니다.
주를 섬겼습니다
첫째로, 주를 섬기는 것이 바울의 목회였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 목회는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원문에 보면 섬겼다는 말이 맨 앞에 있습니다. 겸손, 눈물, 인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말들보다 더 중요한 단어는 섬김이란 단어입니다. 바울의 목회는 섬김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Serving the Lord”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목회의 중심이시고, 교회의 중심이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머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머리는 생각하고 결정하고 명령하는 부분입니다. 주님이 판단하시고, 주님이 결정하시고, 주님이 명령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이며, 좋은 교회입니다. 섬긴다는 단어는 “douleuvw”입니다. 종으로써 섬긴다는 말입니다.(to serve as a slave) 종은 주인의 뜻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구성원들은 주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원리를 떠나면 교회는 인간적인 것이 되고 세속주의로 떨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심이 되지 않을 때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섬기지 말라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다음 절에 보면 사람을 섬기는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 역시 주님을 섬기는 것의 다른 모양입니다. 성도를 섬기되 사람으로서가 아닌 주님의 몸으로서 섬깁니다. 바로 이점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교회와 동창회가 뭐가 다릅니까? 교회와 향우회가 뭐가 다릅니까? 교회와 친목회가 뭐가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섬기지만, 교회 구성원은 주님의 지체를 섬깁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다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차량 안내를 하는 것도 주님을 섬기는 한 부분입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식당 봉사, 구제하는 일, 전도하는 일, 이 모든 일이 다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처신할 수 없습니다. 좋고 나쁨을 따라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섬기되 세 가지 자세로 섬겼습니다.
첫째는 겸손의 섬김입니다. “모든 겸손”(with all humility of mind)입니다. 이 겸손의 기본 정신은 예절적인 겸양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종 된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는 종의 의식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절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공인데 누구 말을 듣고 섬기겠습니까?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사람만이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항상 종의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약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유1:1)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둘째는 눈물의 섬김입니다. 눈물은 진실의 표식입니다. 또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의 표현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메마른 법관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잘못하면 정죄하고 비난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것이 주님의 심정입니다. 대개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법과 원칙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감성으로 키웁니다. 결과적으로 아비 없는 자식보다 어미 없는 자식이 비뚤어질 될 확률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법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눈물로 다스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애 엄마들은 눈물이 없어요. 자식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엄마가 자식을 버리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감정 없는 사람, 무자비한 사람이 쏟아져 나옵니다. 자녀를 위한 엄마의 신앙교육이 뭡니까? 자식을 위해 울면 됩니다. 엄마가 베갯머리에서 자식을 위해 울면서 기도하면 어떤 자식도 절대로 나쁘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한나의 교육방법입니다. 교인들은 법관처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울기를 잘 해야 합니다. 누가 아프면 같이 울고, 누가 사고 나면 같이 울고, 누가 실패하면 같이 울고, 누가 고통 받으면 같이 울고, 누가 죄를 지어도 같이 울고, 기쁜 일이 있어도 같이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위해 우는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주님을 섬기되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눈물로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시험을 참는 인내의 섬김입니다. 시험(peirasmov”)이란 말은 실험하여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참다운 섬김은 시련을 통해 입증됩니다. 주님을 섬기는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유대인들에게 시험을 당했습니다. 뭘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게 아닙니다. 잘못이 없는 데도 해칩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일 하다가 이유 없이 욕먹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욕먹는 것은 약과입니다. 바울은 매 맞고, 갇히고, 굶주리고, 오해 받고, 모함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섬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일이고, 목회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목회의 주안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 된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을까요? 바울은 목회자로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침으로써 섬겼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20) 그것은 바로 성도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는 일입니다. 유익(sumfevrw, profitable)이란 말은 세속적 관점에서의 이해상관을 말한 게 아닙니다. 영적인 유익을 말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의 유익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주는 유익입니다. 믿음을 세워주는 유익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성도를 가장 유익하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바울은 두 방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는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으로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가르친 일입니다. 먼저는 공중 앞에서 전했습니다. 전했다는 말은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집집마다 방문한 것은 오늘날 심방의 기원이 됩니다. 어떤 식으로 하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의 직책은 물질적 도움을 주는 직책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어떤 자문을 해주는 직책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도구로 하여 영혼을 살리는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45) 여기서 주인집은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주인집의 종은 교회 일군을 가리키며 때를 따라 나눠줄 양식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때마다 말씀을 나눠주는 직책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목회자가 가진 가장 중요한 콘텐츠(contents)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일을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조직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교회라는 목장이요 밭에 뿌려지는 생명력을 가진 씨앗입니다. 말씀을 뿌리면 사람의 마음과 삶에 열매를 맺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세요. 사람의 마음에 말씀의 씨를 뿌려 놓으면 100배, 60배, 30배의 결과가 나옵니다. 여기서 100배, 60배, 30배란 수치는 영적 변화의 정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영혼을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생각과 사상이 바뀝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평등하고 모순이 많을까? 둘러엎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바뀐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부터입니다. 모든 불평등과 모순이 인간의 죄악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질 중심 가치관이 영혼 중심 가치관으로 변했습니다. 현세 중심 가치관이 영원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삭개오처럼 물질관이 바뀌고, 베드로처럼 직업이 변합니다.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 유일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목회자는 바로 그 하나님 말씀을 도구로 삼아 교회를 섬기는 말씀의 담당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에 조금도 위축됨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거리낌이 없이”란 말은 위축됨이 없다(did not shrink)는 뜻입니다. 바울은 황제 앞에서든지, 총독 앞에서든지, 재판관 앞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는 누가 협박한다고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또한 듣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특정한 말씀만 편중해서 전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무슨 말씀이든지 전해야 합니다. 칭찬하라고 하시면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하시면 격려해야 합니다. 책망하라고 하시면 책망하고 꾸짖으라고 하시면 꾸짖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아합 왕은 800 명이 넘는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아첨하는 선지자들만 있었지, 진리를 말해주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 때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전파자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을 미숙아로 만들고 영적 유아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말씀 전파가 잘 되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습니까? 주의 종을 통해서 전파되는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아멘의 속회가 되면 됩니다. 특히 교회의 여러 직분 자들은 다양한 말씀이 자유롭게 전파되도록 속회를 좋은 토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이 떨어져도 결실하는 밭이 되어야 합니다. 기호에 따라 말씀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영의 양식을 편식하면 영혼의 영양실조가 나타납니다. 어떤 분들은 축복과 칭찬만 즐겨 듣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경을 골고루 듣는 것이 영혼을 기름지게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종들은 어떤 말씀이든지 담대히 전하는 것이 사명이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마음을 열고 어떤 말씀이든지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은혜의 목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믿음을 전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바울이 전파한 말씀의 핵심 내용입니다. 즉, 바울이 말씀의 사역자라고 했는데 어떤 말씀을 전했는가? 회개와 믿음이 모든 설교의 중심 주제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첫째는 회개입니다. 바울은 회개를 전하는 설교자였습니다. 회개는 영적 치유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회개하라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윤리적 회개나 후회가 아닙니다. 신앙적 회개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 즉 신앙적 회개입니다. 신앙적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 행위를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모든 것이 다 적대적 행위입니다. 윤리적 범죄도 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 행위입니다.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탐욕이 다 하나님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살인 교사,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개할 때에는 우리아에게 죄를 지었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범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 인간을 향한 범죄행위는 다 하나님을 향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하나님께 해야 하고, 용서도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회개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특별히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일생에 한 번 있습니다. 회심은 구원의 관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회심을 한 사람들입니다. 회심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회개입니다. 회개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점점 주님을 닮아가고 거룩해져가기 위해 회개가 필요합니다. 거룩은 영적 건강의 지표입니다. 회개 잘하면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우리는 매일 피곤해도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이 유지됩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 영혼도 날마다 죄의 먼지를 털고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건강이 유지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죄가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지은 죄를 씻어야 합니다. 어떻게 매순간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백(confess)하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오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영혼의 건강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통해 항상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1) 우리가 어느 순간에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지하는 것 한 가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곧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증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때문에, 나는 어디서나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세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모든 죄를 용서받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목회자는 설교 할 때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얘기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라는 말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저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영적 건강을 찾으세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세요. 그것이 오늘 내가 안고 있는 모든 당면 과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20:33-35)
물욕 없는 삶
에베소 장로들을 위한 설교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물질에 대한 교훈입니다. 물질관은 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이 말씀에는 바울의 역설적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몸을 바치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육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영성이 좌우됩니다. 마찬가집니다. 교회 일군은 물질관이 바로 되어야 영적 직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의 물질관을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욕을 버리는 일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삶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3) 은이나 금이나 의복은 성경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재산 목록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아간이 훔친 전리품은 바로 은과 금과 의복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7:21)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주인 몰래 요구한 것도 의복과 은입니다.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왕하5:22-23)
재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유욕을 갖게 합니다. 아합은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신하의 포도밭을 탐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부동산 욕심입니다. 다윗은 많은 왕비와 여인을 거느린 왕이었지만 밧세바를 보고 소유욕에 빠졌습니다. 저 여자를 소유했으면! 그래서 결국은 불륜에 빠지고 살인에 빠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은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싸움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마귀는 탐심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성경 계명의 요약이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바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앞선 아홉 가지 계명 하나하나가 다 탐심에 걸리면 넘어집니다. 탐심 때문에 발람처럼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탐심 때문에 우상에 빠집니다. 탐심 때문에 불효자가 됩니다. 탐심 때문에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탐심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사도 바울은 탐심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로서 성공했고, 목회자로서 성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물질의 탐심을 이겨야만 합니다. 물욕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재산 상속 문제로 질문할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탐심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우선 탐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탐심은 백해무익하고 불건전한 욕망입니다. 그 자체로써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탐심은 자신에게 해롭고, 남에게 해롭습니다. 탐심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유 할수록 더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만족체감의 법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칸 방 하나라도 있었으면 만족하리라” 하다가, 집이 생기면 “이 작은 집에서 어떻게 사나?” 하면서 더 큰 집을 갈망합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27:2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바울은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렸습니다. 부모에게 받을 상속 재산을 버렸습니다. 학문적 업적도 버렸습니다. 유대 사회가 주는 신분의 특권도 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송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우리는 조만간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잠깐 쉬어가는 나그네입니다. 장차 들어갈 천국이 우리의 진정한 거주지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사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쌓아 두려고 하지 마세요. 현재 상황에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성실한 노동
바울의 물질관 둘째는, 성실한 노동입니다. 바울은 친히 노동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34,35) 바울의 직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천막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 앞에 자신의 두 손을 들어보였습니다. 내가 이 손으로(ceivr: 노동 수단으로써의 손) 노동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노동을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첫째로, 자급의 원칙입니다.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34) 바울이 비록 전도자로 헌신했지만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전도 했습니다. 그것은 생활비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특권이 있지만 그 특권을 사양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4-6)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8-10)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2)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4-15)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놀고먹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히 돈 벌고 쉽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젊어서 떼돈을 벌어놓고 노후에 누워서 손 놓고 먹고 사는 방법을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도적놈의 심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3:19)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3:10)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일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온다 해도 우리는 신성한 노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노동하여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자선의 목적입니다. 나 하나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노동은 남을 돕기 위한 노동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35) 내 수고의 소득으로 남을 돕자! 그것이 바울이 가진 자선의 원칙입니다. 요즘 남의 돈으로 자선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선은 내가 수고하여 번 것으로 남을 돕는 일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예전에 남의 재산 축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 손으로 벌어서 선한 일을 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 하나 겨우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노동에서, 나아가 남을 돕기 위한 노동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권면이요, 주님의 권면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
바울의 물질관 셋째는,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원리입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 왜 주는 것이 복일까요?
첫째로, 줌으로써 내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영적 행복의 원리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여리고 성의 세관장이었던 삭개오를 보세요.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이 변했습니다. 주면서 행복해 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19:6) 예전에 삭개오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대접하면서 즐거워 합니다. 평생 돈 모으는 재미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재산의 절반을 내주겠다고 하면서 즐거워 합니다. 주는 삶이 행복합니다. 받을 것만 생각하고, 받기만 바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내겐 안 주나? 왜, 나는 빼놓았을까? 왜, 남들만 가지고 있는가?” 밤낮 뺏을 궁리만 합니다. 그러다가 거지발싸개처럼 된 것이 북한 공산당입니다. 밤낮 남의 것 뺏어 먹을 궁리만 하니 될 게 없어요. 전 국민이 우울증에 걸려 있습니다.
오늘 내 주변 사람이 뭔가 달라고 합니까? 내가 형제들보다 잘 살고 있습니까? 내게 손 벌리는 사람들이 많나요? 싫어하지 말고 주세요. 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저는 지금도 줄 수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자식에게, 부모님께, 이웃에게, 뭔가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사랑도 주고, 지혜도 주고, 다 주세요. 자식에게도 주고, 부모님께 드리고, 형제자매에게 주세요. 이웃에게 주세요. 주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심리학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누리는 최상의 행복감은 남에게 베푸는 행복감이다! 심리학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면 행복하도록 만든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주는 삶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세요.
둘째로, 줌으로써 하나님께 엄청나게 되돌려 받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얼핏 보면 손해나는 일처럼 보입니다. 성경 전도서에 보면 자선 사업은 음식을 강물에 뿌리는 것처럼 헛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되찾을 날이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누가 찾아 줍니까? 누가 되돌려 줍니까? 하나님이 되돌려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내가 남에게 준 것보다 몇 백 배, 천배, 만배 되돌려 주실 수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곡식 장사는 될 수 있으면 곡식이 그릇에 많이 담기지 않도록 살살 담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때에 그냥 담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후히 담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십니다.
지구상에 보세요. 주는 나라는 다 선진국입니다. 받는 나라는 다 후진국입니다. 선진국이니까 주는 건가요? 주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우리도 먹고 살 것이 없는 데, 무슨 해외 선교사를 그렇게 많이 보내는가? 그런데 이제 보세요. 이제는 국가에서 해외 협력단을 보냅니다. 유엔 분담금을 늘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푸는 자에게 더 주십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신24:19-21)
셋째로, 줌으로써 영혼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복음 전파입니다. 어떻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할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어떻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됩니까? 그 하나의 방편이 바로 주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성도들은 남에게 줘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의복도 주고, 학자금도 주고, 양식도 주고, 줘야 마음이 열립니다. 줘야 예수님 사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줘야 인간 관계가 원활해집니다. 줘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줌으로써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정신이요, 복음이요, 오늘의 최종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물질관은 전도자에게, 교회 일군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물질관을 가졌는가? 첫째로, 물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심을 버리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노동을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삶을 위해 노동해야 합니다. 또한 남을 돕기 위해 노동해야 합니다. 셋째로,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복입니다. 줌으로써 행복하니 복입니다. 줌으로써 더 많이 받게 되니 복입니다. 줌으로써 복음이 전파되니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