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5월 1일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
사도행전20장1절~12절
바울은 3차전도 여행에서 3년간을 에베소에서 전도했습니다. 그 중에 석 달을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했고 두란노 서원에서는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2년 동안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흩어져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소요가 그친 후 바울은 도망치듯 에베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일이 권면한 후에 정식으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에서 드로아에 오기까지 10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마게도냐는 2차 전도여행 중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받고 건너갔던 유럽 최초의 선교지였습니다. 마게도냐에서 어디를 방문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지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 다음으로 헬라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고 했는데(2…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을 있다가…) 헬라는 아가야 지방을 말하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 그래서 석 달을 머물렀다고 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석 달 머물면서 중요한 일 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 때 로마서를 썼습니다. 아는 대로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代書)했고 고린도 외항이었던 겐그레아 교회의 여 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1. 바울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한 가지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고 한 가지는 학자들이 미루어 짐작하는 내용인데 그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첫째는 다니면서 제자들을 권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여러 말로’란 ‘여러 가지 말로’, ‘많은 말로’ 성도들을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자기가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애정이 갔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바울의 위로와 격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예수 믿기가 쉬웠겠습니까? 쉽지 않았어요. 사회적인 분위기, 집안의 분위기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쉽게 왕따 당하고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생명을 건 핍박도 받아야 했습니다.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예수 믿겠다.’ 고백하고 세례 받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싹이 자라기도 전에 부러질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권면해 주어야 자신의 믿음을 지켜낼 수가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복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자기가 전했던 곳을 다시 돌아보면서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일에 힘썼습니다. 아기 낳는 것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으로 부모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지 않으면 그 아기는 고아가 됩니다. 아기가 성장하여 제 일을 스스로 해 나갈 때까지 부모는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오늘 말씀은 10개월의 전도 여행은 바로 이 양육을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모금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4절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바로 지역 교회와 대표자들로 연보 모금을 위한 책임자들이었다고 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타고 닷새 만에 드디어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1. 드로아에서 발견된 세 가지 사실
“7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구절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18:4에서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 독립적으로 주일 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의 안식 후 첫 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규칙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독립적인 예배일이 시작되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세상에 드러날 것이기에 자신들의 소속감도 분명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정기적이고 독립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⑵ 또 하나 볼 것은 7절을 보면 예배에 대한 두 가지 형식과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과 말씀을 강론한다는 바로 두 가지입니다. 떡을 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는 ‘애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21-22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먼저 먹기 시작하니 후에 오는 사람은 먹을 것이 없게 되고, 절제 없이 포도주를 먹게 되니 취하기도 하는 폐단 때문에 점차 약화되었고 그리고 남게 된 제도가 ‘성찬’(the Lord’s Supper)입니다. 본문에 떡을 뗀다는 것은 바로 ‘주의 거룩한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성찬’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두 달에 한번 하는 성찬이 매 예배 때마다 있었습니다. 떡을 떼는 것과 함께 말씀 강론이 있었는데 성경에 보면 떡을 떼는 일은 말씀 강론 후에 있었습니다. 어떤 예배학자는 예배는 반드시 떡의 성찬과 말씀의 성찬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현대 예배에서 약화된 성찬식 부분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미국 교회들 중에 매주 성찬을 꼭 나누는 교회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의 예배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드려지고 성찬 분급도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성도들끼리 둘러서서 분급하고 서로 기도해줍니다. 실제로 개 교회가 주일 낮 예배마다 성찬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과 복잡함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주의 성찬과 말씀이 함께 예배에 드려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⑶ 세 번째 개인집 다락방이 예배 장소로 쓰여 졌다는 것입니다.
‘친절하고 사랑스런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갑바도기아는 앙카라 동남쪽으로 320km 지점에 해발평균 1000m의 소아시아 반도 중앙 고원에 있습니다. 이 갑바도기아는 지하교회(동굴교회)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250여 년 동안 피신 은둔 생활을 했는데, 바로 이 지하교회(동굴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땅 속에 주거지도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고, 후에는 이슬람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AD 70년경부터 박해가 시작돼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AD 313년까지 계속되었기에 갑바도기아 땅굴 사람들 중엔 그 땅굴에서 태어나 한 번도 햇볕을 못보고 땅굴 속에서 죽은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데린구유라는 곳에는 지하 20층까지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8층까지만 개발되어 순례자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옛날 믿음을 가졌던 성도들이 볼 수도 없는 캄캄한 동굴에서 부모에게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지하 동굴 교회라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예배드렸음을 생각하면 오늘의 우리는 부끄러워지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고 행복하게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 당시 믿는 성도들은 함께 예배드릴 성전도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 했을망정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개인집 다락방이 넓어야 얼마나 넓었겠습니까? 유두고는 창에 걸터앉아야 했을 정도로 모인 사람들에 비해 장소는 비좁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드리며 열심히 모이고 진심으로 뜨거운 예배드려야 하겠습니다.
2. 깊이 잠든 한 청년 유두고에 대하여 생각한 바를 말해 봅시다
“9유두고(Eutychus)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상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드디어 오늘 중심이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쉽게 설교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먼저 생각해 봅시다. 잠이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요 은혜중 하나입니다. 시편 127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때로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수면제 먹어야 잠을 자기도 하고. 단잠, 꿀잠이라는 말이 있지요? 잠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속도로 사고 중 가장 많은 것이 과속과 졸음 운전이라고 합니다. 졸면서 일하다가 기계에 다치기도 합니다. 자다가, 졸다가 인생 망친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유두고는 왜 졸았을까요? 오늘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를 보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유두고가 졸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들으면서 졸면 되느냐고 하는 책망으로 결론지을 문제는 아닙니다. 그날따라 바울의 설교가 길었어요. 9절 보니까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설교가 긴 것이 좋겠습니까? 짧은 것이 좋겠습니까? 설교도 설교 나름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은 것 좋아합니다. 설교시간 30분만 넘으면 슬금슬금 시계보지요. 몸을 좌우로 비틉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지요. 오늘 말씀을 보면 유두고는 비록 졸다가 3층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말씀을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사방에 등불을 밝히고 다락방에 가득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떠날 줄 몰랐습니다.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물론 7절에 보니까 바울은 다음날 드로아를 떠나야 할 형편이었기에 가르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들어줘야 가르칠 것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어요. 11절 보니까 강론마치고 성찬 나누고 그리고 다시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11절은 미루어 짐작하기는 설교가 끝나고 집으로 곧장 헤어지지 않고 다시 설교에 대하여 서로 나눈 것 같습니다. 공식 예배의 설교의 이어진 대화였습니다. 역사상 교회가 부흥할 때 설교나 성경공부 말씀이 길었습니다.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는 10시간 동안 설교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 하나 부흥하는 교회는 설교가 좀 긴 편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박 목사 설교가 짧은 탓입니다) 설교가 30분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좀 깨어져야 합니다. 당시 밤새워 말씀 듣는 드로아 사람들이 부러워집니다. 우리도 “성경말씀을 밤새워 성경공부 좀 합시다.” 라는 말을 듣는 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새워 찬양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기도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말씀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고스톱 칠 때는 무릎 관절염도 통증도 없지 않습니까?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유두고가 졸았던 이유는 피곤했기 때문일 겁니다. 성서 주석가들은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 때문에 피곤했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많은 등불로 인해(8절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방안이 더워졌을 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등불 때문에 산소부족 현상이 나타나 졸음을 가중시켰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래 저래 피곤했기 때문에 졸았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 그냥 자지 않고 그곳까지 왔으니 유두고 믿음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 예배드리기 전에 할 수만 있으면 피곤하지 않게 좀 잘 쉬자는 것입니다. 토요일 일찍 주무세요. 텔레비전 일찍 끄세요. 지금 우리가 한 밤중에 밤새워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잠잔다. –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자니 집에 있는 것 보다 낫잖아?’ 그래요. 그런데 자지 않으면 더 좋지요. 예배는 토요일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토요일은 일찍 쉬자’ 원칙을 세우세요.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이유는 자리 문제도 있습니다. 유두고가 건방져서 창가에 걸터앉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방에 사람이 꽉 찼으니까 유두고는 청년이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을 겁니다. 더구나 졸리기도 하고 등불로 혼탁해진 공기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창문에 걸터앉았을 것입니다. 유두고 책망하려는 생각은 사도행전을 쓴 사람도 없었고, 저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졸리더라도 창문턱에 걸터앉지만 않았다면 그런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자리입니다. 만일 유두고가 바울의 바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더라도 피곤하다고 졸았겠는가? 모르긴 해도 쉽게 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와 가까운 자리는 금(金)자리, 조금 먼 자리는 은(銀)자리, 아주 먼 자리는 잠자리. 앞에 앉으세요. 졸 위험이 많은 사람은 꼭 앞에 앉으세요. 훨씬 덜 졸릴 겁니다. 유두고가 반듯하게 앉지 않고 비스듬히 걸터앉았던 것도 추락사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깨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盜賊)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유두고의 죽음을 본 바울의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무엇이 생각납니까?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리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의사 누가인데 의사가 죽은 것과 기절한 것쯤은 구별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시체)을 안았습니다. 여기서 무엇 생각나는 것 없으십니까? 열왕기상 17장에 가뭄에서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먹을 것을 주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바울이나 엘리야나 사랑이 있었습니다. 말씀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의 부모의 심정, 과부로 홀로 살면서 키웠던 아들이 죽었을 때의 어머니의 심정. 어떻겠습니까? 바울이나 엘리야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내 탓이냐?’고 회피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죽은 것을 낸들 어떻게 한단 말이냐?’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끌어안았습니다. 시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고통과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성도와 함께 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떠들지 말라는 말은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쩌자고 의사 누가도 죽었다고 판정을 내린 유두고를 끌어안았던 것일까요? 죽은 자를 살려낸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시체에 손을 대고 살려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체마다 기도하면 살아난다면 장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믿음을 봅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기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엄청난 능력의 보고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보고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의 원천이 우리 중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눈을 떠야겠습니다. 성령께서 하고자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강력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빈자리가 보이십니까? ‘언제 채우나?’ 걱정이 되십니까? ‘내가 채우리라’는 의지와 믿음이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채워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믿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빈자리 채워지면 누가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예수 믿으 세요” 의지와 믿음으로 외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배 중에 아이가 이층에서 떨어졌다 –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끄럽게 되고, 야단날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예배 마치겠습니다.” 하고는 사태 수습하려고 바쁘게 나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했어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고는 올라가서 성찬식하고 그리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설교하고 대화하고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난 사람 때문에 개역성경에는 ‘적지 않게’ 표준 새 번역에는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장소 탓하지 않고, 시간 탓하지 않고 열심히 모였습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하여 믿음을 굳세게 세워나갔습니다. 유두 고를 통하여 내가 찾아내어 행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라도 예배시간에는 졸지 맙시다. – 형편과 이유야 다 있겠지만 매일같이 졸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기도 합시다. “오늘 성경 말씀 한 구절이 내 평생 잊혀 지지 않고 나를 사로잡는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기대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받읍시다. 집중합시다. 할 수만 있으면 관람의 자리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주연 자리에 앉읍시다. 바울을 통하여 배우고 행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합시다. 어떤 경우라도 성령의 역사에 삶을 열고 기대하며 나아갑시다. 나는 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환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여행이요 세상을 바꾸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