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4월 5일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8장1절~17절
1.바울의 제2차전도지 고린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아테네를 떠난 바울은 고린도로 향했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1) 고린도란 도시가 어떤 곳인가?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서서남쪽으로 약 80km 지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통 반도라 하면 길게 뻗어 있는 육지를 말하는데,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육지가 거의 잘려서 섬처럼 생겼습니다. 고린도는 바로 그 잘려진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쪽은 에게해, 서쪽은 고린도만을 통해 이오니아 해(아드리아해 남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1893년에 이 육지의 잘룩한 부분을 파내서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펠로폰네소스 섬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상업 발달에는 기가막힌 요충지입니다. 남북으로는 육지 교통의 요지이고, 동서로는 해상 교통의 요지입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동쪽은 겐그레아, 서쪽은 레기움이란 항구가 있었고 고린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린도는 테에베,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맹주였습니다. 오랜 기간 고린도는 아테네와 정치, 상업, 해상의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주전 7세기 키프셀루스 왕 시대에 전성기, 전 헬라의 빛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주전 146년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로마군의 루기우스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초토화 되고 방치되었습니다. 그 후 정확히 100년 후인 주전 46년 로마의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다시 건설된 후 “율리우스의 찬미인 고린도”라는 칭호가 붙여졌습니다. 그 후 이전 영광을 되찾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는 아가야의 수도로 정해졌습니다. 바울 당시 인구 60만의 큰 상업도시였고, 그 중 자유인이 20만 명, 노예가 40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주민은 주로 헬라인이었지만, 다수의 이방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유대인들도 다수 거주하였기 때문에 유대인 회당도 있었습니다.
아테네가 문화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도시였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본받아, ISTHMUS 경기를 개최했습니다. 로마의 검투기 경기도 도입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헬라의 여러 신들을 섬겼지만 특히 아프로디테를 주로 섬겼습니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신인 만큼, 성적으로 방탕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와 같이 됨”(코린티아조)이란 단어는 곧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매춘이 공인되었습니다. 매춘이 허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약 1천여 명의 매춘부가 있어서 성행위는 신전 예배의 일부로 신성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여자”라는 말은 곧 매춘부를 가리키는 말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고린도에서 바울은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아테네 시민들에게 받은 실망감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을 보았을까요? 바울은 이 고린도에 오히려 영적 갈망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말씀이 기억났겠지요. 고린도 사람들은 아테네 사람들처럼 인간적 철학에 바싹 구워진 고집통들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허술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유럽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반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고린도 전 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그 곳에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바울이 고린도 전도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일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2-3)
우선 이들의 신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입니다. 아굴라란 라틴식으로 하면 아퀼라(AQUILA)이고, 브리스길라는 PRISCILLA입니다. 아굴라는 본도(PONTUS) 출신입니다. 본도는 지금 터키의 갑바도기아에서 약간 북쪽 지역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명문가 출신의 여성입니다. 아굴라가 본도 출신으로 어떻게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굴라는 로마에서 브리스길라를 만나 결혼한 듯 합니다. 이들이 이탈리아를 떠난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AD 41년 즉위하여, 54년에 독살된 황제입니다. 그의 추방령에 대한 기록은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기록한, “Life of Claudius”란 책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록에 보면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란 지도자를 따라 계속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크레스투스란 인물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학자들이 추측하는 것은 수에토니우스가 유대인에 대해서 별다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크레스투스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입니다. 로마인이 볼 때, 처음 발생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유대인들 내부의 소란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엄히 다스려지던 것은 폭동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소란을 떨 때에 황제는 기독교인이든 유대교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한 언급은 바울 서신에서 몇 군데 특별히 언급되어 있습니다.(롬16:3-5, 딤후4:19, 고전16:19) 로마서의 기록에 보면 이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3-5) 평생 동지를 한 사람만 얻으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평생 동지를 고린도에서 만났습니다. 아테네에서 낙심한 바울에게 하나님이 위로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은혜 생활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고독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바울 곁에 좋은 동지를 늘 보내주셨습니다.
첫째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셋째로, 이들은 모든 교회에 좋은 동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전선에 뛰어든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군만마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성경에 나타난 가장 이상적인 부부입니다.
첫째로, 이들은 같은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이들의 직업은 텐트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텐트는 주로 가죽이나 털로 짠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텐트는 수요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군대의 막사로도 수요가 많았고, 장거리 여행이나, 목동들의 거처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텐트 만드는 일은 사회적으로 품위가 높은 직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바울과 아굴라가 텐트 만드는 일을 왜 하게 되었을까요?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유대인들의 교육에는 반드시 직업교육이 있습니다. 육체노동을 익히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불경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랍비들도 자연스럽게 노동을 수반하는 직업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지방은 산양털로 만든 기지가 생산되는 지역으로 바울은 어려서부터 천막 만드는 일을 몸에 익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이 일을 하면서 자급 전도를 했습니다. 아무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같이 노동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같은 신앙을 가졌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와서 믿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했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들은 항상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같은 믿음이란 교리적으로 같은 신앙고백을 했다는 의미이지만, 같은 수준의 믿음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어떤 부부들을 보면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항상 마찰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는 아내가 너무 많이 나가서 탈입니다. 어떤 부부는 남편이 너무 나가서 탈입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편에게 태클을 겁니다. “당신 너무 교회에 빠지지 마!” “주일 예배는 참석해도 성가대는 하지 마!”“주일 저녁까지는 좋은데, 수요일은 가지 마!” “새벽기도는 하지 마!” “제발 십일조는 하지 마!” 뭐, 이런 식입니다. 신앙이 다르더라도 서로 태클 거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 끌어주는 형태가 되면 좋습니다. 아내가, 혹은 남편이 나보다 더 잘 믿는 것을 좋아하고 격려하세요. 성경에 보면 아굴라 못지 않게 브리스길라도 똑똑하고 훌륭한 여성입니다. 본문이나 고린도전서(16:19)에는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오지만, 다른 성경에 보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8:18,26, 롬16:3, 딤후4:19) 어떤 사람들은 브리스길라가 명문가 출신이라 그렇게 기록했다고 하지만 성경의 기준은 가문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분명히 아내가 남편보다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더 믿음이 좋든, 부부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부부가 가장 좋은 부부입니다. 오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이런 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 했습니다. 이들의 행로를 보면 고린도에서 바울과 합류한 후에 후일 에베소 교회에서 충성하면서, 그의 집에서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중간에 로마에도 다녀 온 것 같은데, 특이한 점은 항상 부부의 이름이 함께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한 몸이 되라는 말씀은 단지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they shall become one flesh.” (NASB) 부부가 어디든지 항상 몸이 함께 하는 동행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함께하면 몸도 따라갑니다. 그러나 몸이 함께하면 마음도 따라가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몸이 함께하지 않으면 마음이 따라갈 리 없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이상적인 결혼 가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독신자인 바울에게 부부가 함께 잘 사는 모습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 힘이 되기보다는 걱정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통해서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런 평생지기 부부 친구가 되어 주든지 하나 만나든지 아니면 만드시기 바랍니다.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노후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든든하게 만듭니다.
3. 바울은 어떻게 전도 하였습니까?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바울의 변함없는 전도입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4)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삶에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환경이 바뀌든지, 형편이 바뀌든지, 일정한 생활 방식을 지켜갑니다.
첫째는, 노동이나 삶의 습관입니다. 천막 만드는 일을 하는 직업적인 노동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어딜 가나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눕기까지의 일과가 일정합니다.
둘째는, 신앙 습관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생활, 주일 성수, 말씀 묵상, 안식일 회당에서의 전도 등이 일정합니다.
셋째는, 전도의 원칙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 먼저 동족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바울의 이런 원칙은 때와 장소가 달라져도 항상 지켜졌습니다. 전도 대상자가 많든 적든, 그들이 적대적이든 호의적이든, 전도는 계속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도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변변찮은 결과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에게 고린도에서 평생지기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좋은 동역자 좋은 삶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심기일전하여 다시 전도에 헌신했습니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이 사도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복음 전파에 함께 헌신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