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4월 26일    :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다.

사도행전19장21절~41절

 우리는 위대한 꿈을 꾸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사명수행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사명을 더 귀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큰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계선교의 꿈입니다. 즉 세계선교를 꿈꾸던 그에게 세계선교의 중심무대가 되는 로마 선교에 꿈입니다. 당시 로마는 모든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1. 바울은 어떤 비젼을 가졌습니까?

 

21절 말씀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오늘 말씀에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위대한 비전을 먼저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바울은 시도했습니다. 로마전도가 얼마나 기독교역사에서 위대한 일인지 아십니까? 주후 313년에 로마가 국교로 된 이후에 기독교 역사의 중심이 되었고 서양교회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전도를 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가 서양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로마전도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기독교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 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전도는 교회사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로마전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선교의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로마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가졌습니까? 하나님이 곧장 “바울아 너는 로마로 가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먼저 바울은 19장 21절에 소원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런 로마 선교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3:11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소원하는 것을 통해서 비전을 베풀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비전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은 그 소원을 비전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 사람의 소원의 내용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면 그 그릇의 가치를 압니다. 밥그릇은 밥 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릇에 보석을 담으면 보석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릇에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귀한 소원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나의 소원의 내용과 크기에 따라서 나의 가치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품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서 소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소원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장점을 보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강점이 무엇인지를 보고 거룩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확신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꿈이요 비전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의 강점을 살려 소원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비전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그 비전을 어떻게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바울은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얼마간 더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머물렀으나, 에베소에서는 3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의 철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도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먼저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준비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능력과 실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능력과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도했고 능력으로 준비했고 실력으로 준비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아볼로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합니다. 행19:6절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9:11-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하여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바울이 사용하는 손수건이나, 혹은 장막을 만들 때 사용하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떠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19:19절에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사도 예수를 영접하고 모든 마술 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위대한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누구보다 실력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가 실력을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소동의 배경, 아테미 숭배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아데미의 숭배자들이 바울과 기독교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킨 겁니다. 앞서서 에베소가 마술의 소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이 실제로 숭배하던 것은 마술사들이 아니라 아데미(Artemi) 여신입니다.

아데미 여신이 누구일까요? 어떤 영문 성경에는 아데미란 이름 대신 다이아나(Diana)란 이름으로 번역했습니다. ‘다이아나’는 그리스 여신 아데미를 로마식으로 표기한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 여신 아데미와 에베소 사람이 섬기는 아데미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는 제우스의 딸이며, 아폴로의 누이로서, 처녀 신으로 순결과 공명의 신이며, 사냥의 신이며, 달의 신입니다. 여기에 비해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는 모든 인간과 신들의 어머니로서 만물의 보육자요, 인간과 모든 생축의 생산을 담당하는 여신이었습니다.

왜 에베소가 아데미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합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에베소를 가리켜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35) 제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제왕이요 하늘의 신입니다. 그 제우스에게서 우상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운석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어느 날 에베소 지역에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운석의 모양을 보니 유방이 여러 개 달린 여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많은 자식을 낳아서, 풍부하게 먹이는 어머니! 그것이 아데미의 이미지입니다. 아데미는 생산의 여신입니다. 풍성한 곡식을 내는 대지, 많은 새끼를 생산하는 가축들, 자녀가 많은 사람들이 다 아데미의 영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가슴을 달고 있는 아데미 상은 나중에 황소의 고환이라는 설로 밝혀지기도 했는데 5월 여신의 축제때 황소를 희생으로 드리고 고환을

 

노끈에 매달아 목에 거는 풍습에서 유래 됐다고 한다. 지금도 터키의 에베소를 방문하면 쉽게 이 여신상을 볼수 있다하니 사도 바울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나 봅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아데미를 섬겼을까? 그것은 당시 아데미 신전의 규모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대략 폭이 200피트(약60미터)에 길이가 400피트(약120미터)나 되고, 높이 60피트(약20미터)의 대리석 기둥 127개가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주전 550년 경 창건되었다가, 주전 356년 헤라스트라투스란 사람에 의해 불태워진 후 다시 세워졌습니다. 재건된 신전 역시 주후 262년 경 고트족의 침입 때에 파괴되었습니다. 그 파괴된 신전 터가 1863년 J. T. Wood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바울 당시 이 신전을 관리하기 위해서 거세된 남자 사제들과 세 등급의 여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여 사제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신전 매춘부 역할을 했습니다. 아데미 신전에서는 매년 춘분을 전후해서, 아데미의 달이 시작되는 것을 축하하는 큰 축제가 열렸습니다. 오늘 말씀에 언급된 소동은 아마 이 아데미 축제의 시기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됩

니다.

 

3. 바울이 군중들의 소란 속에 잡히 내용을 설명하여 보시오

 

소동의 발단은 일단의 은장색들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에서 아데미 신을 섬기기도 했지만, 집집마다 작은 신전 모형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이 신전 모형은 매우 다양했는데, 그 중에 은으로 새겨서 만든 고급스런 것들도 있었습니다. 은장색들은 이런 신전과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중요한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23-24) 이런 은 세공업자들은 나름대로 하나의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과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23-27)

 

첫째는 경제적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데미 신전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하여 신상 판매가 줄고 수입이 줄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데미 신 때문에 생겨난 종교 산업이 망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위신 문제입니다. 아데미 신전 모형이나 신상을 만드는 직업은 당시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상을 헛것이라 함으로 그들은 졸지에 헛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아데미 여신의 위엄의 문제입니다. 에베소인들은 아데미를 대단한 신으로 여겼는데,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 하여 아데미 여신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업의 문제입니다. 바울 때문에 수입이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흥분하는 것은 돈 문제에 부딪칠 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능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로 이런 본능을 자극했습니다. 여러분! 큰 일 났습니다. 저 바울 때문에 우리가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외부로 나타난 구호는 “생계”가 아닌 “아데미”였습니다. 핵심은 돈 문제인데, 구호는 아데미 신의 이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돈 문제를 종교 문제로 포장했습니다. 그래야 더 흥분하니까요.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앞서서 구호를 외쳤습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축제에 참여하던 군중들, 시장에서 오락가락 하는 무리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흥분하여 바울의 동료들을 붙잡아 연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28-29) 당시 연극장은 오늘날처럼 실내 극장이 아닙니다. 잠실 야구장처럼 반원형으로 스탠드가 둘러 있고 앞에 무대가 있습니다. 오늘날 발굴된 에베소 연극장의 유적을 보면 2만 5천 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이런 연극장은 당시 민중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재판을 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 할 것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힌 군중들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흥분하여 사람을 붙잡아갔습니다. 바울의 동료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붙잡혔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 왜 모였는지 몰라요. 그냥 앞에 가는 놈 뒤통수만 보고 따라 온 거예요. 왜 흥분하는지 몰라요. 남들이 흥분하니까 그냥 흥분한 겁니다. 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왔는지 몰라요. 남들이 달려가니까 나도 달려갑니다. 남들이 구호 외치니까 나도 외칩니다. 깊은 사색도 사려 깊은 판단도 없어요. 그것이 바로 군중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입니다. 무리들은 신앙이 없어요. 밥 먹여 주면 우루루 모입니다. 병 고쳐주면 우루루 모입니다. 그랬다가 힘든 얘기 하면 다 떠나갑니다. 현대 사회는 많은 부분이 군중심리에 좌우됩니다. 좋은 말로 하면 여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퓰리즘입니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군중들을 선동하려고 거리로 나옵니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정치를 해야지 왜 거리에서 합니까? 데메드리오는 목적이 있어서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동에 놀아난 군중들은 뭡니까?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바울이 무리 앞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친분이 있는 아시아의 고관들도 말렸습니다.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30-31)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나섰습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란 사람을 군중 앞에 내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알렉산더를 내세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유대교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내세운 것 같습니다. 군중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사건의 결말은 서기장이 나섬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35-41) 서기장은 에베소 시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지도자입니다. 서기장(grammateuv”)이란 말은, city clerk, town clerk, 시장 등으로 번역됩니다. 에베소 시를 대표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생각됩니다. 당시 행정 구조를 보면 이원적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시민 자치 형식의 조직이고, 둘째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총독과 같은 관리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서기관은 로마의 관리가 아니라, 시민 조직의 관리입니다. 서기장은 법령을 기안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총독을 도와서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민회가 열릴 때는 그 내용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기관이 나선 것은 그의 재량권이기도 하고, 그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당시 에베소는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이런 특권은 치안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박탈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군중들에게 바로 이점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서기장의 주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를 섬기는 것이나, 에베소가 아데미 신전의 중심 도시인 것은 아무도 부정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소동을 떨지 말라. 둘째로, 데메드리오와 군중들이 붙잡아 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범죄 행위가 없다.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 한 일이 없다. 아데미 여신을 욕한 일도 없다. 그러므로 재판건이 될 수 없다. 만일 고소할 일이나 재판 건이 있으면 정식 재판 날이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그 때에 고소하라! 당시 로마 총독의 재판은 매월 3회씩 열렸으며, 이 공식 재판 외에 열리는 집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서기장은 군중들에게 겁을 줍니다. 만일 이런 불법 집회가 총독에게 들통 나면 서기장도 문책을 당하고, 소란을 일으킨 주동자도 처벌을 받을 것이고, 에베소 시민들의 자율적인 특권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라! 서기장의 노련한 설득에 군중들은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바울 일행에게 가해졌던 소란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결과로 최소한 바울 당시에 에베소에서 교회나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박해를 당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4.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할 바람직한 기독교의 영향력은?

 

바로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한 기간은 약 2년 반입니다. 그 2년 반 동안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독교인이 많아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그 사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앞서서 마술하는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말씀드렸지요? 마술 책을 가져다 불태웠습니다. 다시는 마술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은 오만 드라크마나 되는 분량의 책을 태웠습니다. 책값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술이란 생업을 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 직업을 갖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데메드리오 사건도 그렇습니다. 은장색들의 수입이 격감할 정도로 에베소 도시의 산업 구조가 바뀐 겁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우상 숭배 행위가 줄다 보니 우상 제조업이 위축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한 도시의 경제가 변하고 있습니다. 산업이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당연히 삶의 변화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변하지 말라고 해도 변합니다. 생각이 변합니다. 사상이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말씨가 변합니다. 생활 습관이 변합니다. 취미가 변합니다. 직업이 변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성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2-26)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8-29)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사람이 변하면 주변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들어갈 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우상 숭배가 제거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는 신화의 제국입니다. 온갖 신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들이 삶에서 제거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격투기가 폐지되었습니다. 노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인간존중의 사상, 자유와 평등의 사상도 성경을 배경으로 합니다.

최근 발생한 세계 금융 위기는 극도의 개인주의, 최대한의 자유, 법치를 가장한 이기주의 때문 입니다. 돈이 된다면 뭐든지 하는 탐욕주의가 세계의 금융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합니까? 노력의 대가보다 천 배 만 배 더 가져가니까 문제입니다. 노력이라고 다 같은 노력입니까? 도둑놈이 도둑질하려고 애쓰는 것도 노력입니까? 사기꾼이 사기 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노력입니까? 폭력배가 다른 사람 두들겨 패는 것도 노력입니까? 남 보다 머리 좋은 것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떼돈을 버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 인구가 천 만 명입니다. 그런데 왜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가요? 복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기독교,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기독교 때문입니다. 라스베가스 교회 목사님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교인들 대부분이 도박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들에게 무슨 설교를 해야 될까요? “여러분은 비록 도박에 종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천국 갑니다!” “여러분은 몸을 팔고 간음죄를 짓고 있지만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갑니다. 안심하세요!” 이렇게 설교해야 합니까? 그럴 수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삶이 변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직업이 변하고, 그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래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참 복음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가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저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우상을 섬기던 집안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새로운 가문이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을 세우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방식이 신앙적입니다. 직업 선택이 신앙적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직업을 선택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기반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사회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경제생활의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직업이 변했습니다. 한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가정이 변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변하고 있습니까? 남을 탓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남도 변합니다. 우리 모두 변화되어 복음의 능력을 나타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