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3년12월20일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5장6절~11절

마이크 버클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1974년 19세 때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영접한 후 2년 동안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동생이 풋볼을 하다가 목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45세의 젊고 인자하신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이크의 실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더욱 그리웠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큰 품으로 나를 안아 주셨을 텐데, 그러면 내 가슴이 시원할 텐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숙사에서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였습니다. 그의 눈이 열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행해 큰 팔을 벌리고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입을 맞추시고 그의 고통을 씻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이크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달려와서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느꼈을 때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그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맛본 사람은 그의 삶이 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누릴 소망의 근거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로마서 5장 6절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할렐루야! 또 어떤 한국의 목사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이것이 어디 그분들만 좋아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우리 모든 성도가 아끼고 사랑해야 할 말씀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버금가는 말씀입니다.

1.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이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 않고 창조하신다. 참 사랑은 창조적입니다. 사랑할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쥬르겐 몰트만도 하나님의 사랑을 창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같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찾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미워할 만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고, 거짓을 참된 것으로 만들고,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은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사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 받을 아이로 키웁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키웁니다. 사랑 받는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키우는 사랑 이것이 창조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2.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 받을 조건이 못되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기서 ‘연약할 때’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무능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또 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 것 아닙니다. 믿음도 갖기 전에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를 부모들이 사랑하지 않습니까? 무슨 조건 때문에, 무슨 자격이 있어서 사랑합니까?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 아닙니다. 세례도 은혜도 받습니다. 세례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면 이미 세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 받은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해 주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대상의 조건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침저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나 죄를 범하고 있을 때나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때는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시고 어떤 때는 근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조건을 따지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빛을 졌습니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십시다.

3.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입니다. 6-11절을 보면 절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절).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9절). 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10절).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드 대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만일 십자가를 거부하셨다면, 만일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뛰어내렸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 길을 다 달려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최후의 유혹을 다 이기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에 한계가 없음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차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미 있는 죽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던지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원수 된 자요,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제는 악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중에는 각 학교에서 2명씩 여학생을 정신대에 보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황 신덕씨가 세운 경성가정여숙에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황신덕-후에 추계학원 원장 및 이사장을 역임-은 폐교를 각오하고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때 김 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로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를 정신대원으로 보내주세요.” “안되! 학교 문을 닫더라도 너희들을 정신대에 보낼 수 없다.” 그러나 김 금진 학생도 단호하였습니다. “선생님, 제 뜻을 받아 주세요. 부모님께도 편지로 보냈습니다. 제가 자원하여 학교를 살리겠습니다.” 김 금진의 말에 황선생과 교직원들은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해도 학생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 금진은 자기의 뜻을 끝내 관철시켜 1945년 5월 전교생의 전송을 받으며 일본의 어느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희생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희생정신도 고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동료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큰사랑입니다. 자기 가문을 위해서 희생하더라도 그 뜻을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요,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큰사랑입니다.

4.하나님의 배려하는 사랑이란?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배려하는 사랑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많이 배려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배려하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배려의 결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고 이러한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배려의 사랑입니다. 할 수 없는데 무자비하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배려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사심으로 인하여 얻게 하신 구원은 완성된 구원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구원의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십자가에서 끝났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인간은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보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별히 몸의 부활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들이 주의 부활을 믿고 완성된 구원에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 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 요구하십니다. 인간의 약함을 배려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조건을 따져 왔습니다. 어떤 조건의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도 배웁시다. 하나님의 배려하는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인격의 길입니다. 성숙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사랑 받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