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1월 11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4장8절~18절

바울의 행선지는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향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극과 극의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집니다. 첫째는 모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사건이고, 둘째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사건입니다. 첫째 사건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오해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둘째 사건으로 가장 처참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의 사건입니다.

1.루스드라 사람들의 우상숭배 원인과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행동을 연구하여 봅시다.

루스드라는 B.C 6년경에 로마 식민지로 흡수되었고 로마황제 아우구스도는 이곳으로 고참 직업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이주시켜 로마의 변방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지배계층은 로마의 직업군인들이었고 원주민 루가오니아인들은 자기네 언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곳의 교육이나 상업의 주도권은 소수의 헬라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대개 거주지에서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건립했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루스드라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10명 이내로 별 영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의 말씀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스드라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神話)를 알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루스드라에 쓰스와 허메라는 신이 내려왔습니다. 쓰스는 헬라의 주신(主神)인 제우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우스는 신들의 우두머리로 올림푸스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다른 신들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제우스를 로마식으로 말하면 주피터가 됩니다.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신의 메시지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신으로 로마식으로 말하면 머큐리라고 불렀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쓰스와 허메라는 신이 루스드라에 강림했는데 마을사람들이 그 신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냉대하고 배척했기에 진노한 두 신은 루스드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농부 빌레몬과 아내 바우시스만이 그들을 환영하였기에 루스드라가 멸망당할 때 그들만 살아남게 되었고 죽은 후에는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 옛날 조상들이 신들을 잘못대접해서 지금 자신들이 잘 살지 못한다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는 상황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나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단번에 고치게 되자 혹시 과거 신화의 주인공인 쓰스와 허메가 강림한 것이 아닐까 하여 야단이 난 것입니다. 11, 12절 봅니다.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方言)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 말하는 자므로 허메라 하더라”

루스드라 사람들이 누구를 쓰스라 생각했습니까? 바나바. 누구를 허메라 생각했습니까? 바울.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바나바는 키가 큰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에게서 쓰스 신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키가 작았고 외모는 볼품이 없었고 얼굴에는 항상 병색이 짙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입을 열기만 하면 강직하고 단호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허메 신이 어떤 신이었다구요? 쓰스 신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바울의 강력한 설교를 들으면서 허메 신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조상들은 신을 잘 대접하지 않아서 화를 당했는데 자기들도 그렇게 어리석은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3)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花冠)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바나바와 바울을 쓰스와 허메로 알고 그 앞에서 옛날에 못다한 대접을 하기 위해서 소잡아 제사도 드리고 꽃도 걸어 드리겠다는 얘깁니다. 여기서부터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쓰스와 허메에게 제사를 드리려 합니까? 왜 우상숭배를 합니까?

1.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두려운 일 많이 만나지요. 내 힘 밖의 일. 예를 들면 까닭 없이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계속해서 사고가 나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신감도 없어지고, 이성적인 판단도 어렵게 되고, 따라서 합리성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우선 의지할 곳을 찾아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지의 결과입니다.

(2) 이루기 어려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원은 있는데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 싶으면 어딘가에 빌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시골의 동네마다 서낭당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하지요? – 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신 신당인데 제 기억에는 돌무더기가 있고 여러 가지 색깔의 헝겊이 새끼줄에 매어 있었고 지나가다보면 열심히 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치병과 무병장수, 새집으로 이사할 때 옛집의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나무에도 빌고 때로는 바위에도 빌었습니다. 아무한테라도 빌어서 자기 욕망과 소원을 이루려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내가 이루려는 소원은 까마득하게 멀리 있을 때 신에게라도 빌어서 소원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우리는 우상숭배의 틈바구니에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며칠 동안 빌면 병이 낫는다든지, 어떻게 지성(至誠)을 드리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든지 하는 얘기 흔히 들었지 않습니까? 아무 신을 만들든지 거기대고 빌어서 소원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상숭배가 생겨났습니다.

(3) 우상숭배는 향락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는 대체로 도덕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상섬기는 사람이 회개했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커다란 잘못을 했다 – 이럴 경우 ‘회개하고 도덕적으로 바로 살아야겠다.’하는 결단하기보다는 ‘내게 어떤 화가 미칠 터인데’ 왜? 잘못했으니까. 그런데 이 화를 어떻게 면할까를 궁리하는데 바로 이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생활을 고치고 도덕적으로 바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우상을 섬겨서 그 화를 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김으로 죄에 대한 가책을 잃어버리고 죄를 정당화 할뿐 아니라 심지어는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무당 춤추는 것 보셨어요? 신 내렸다고 하지요? 참 신나게 춥니다. 춤추는 것 바라보면 빠져요. 뭐든지 다 될 것 같고 잘못 섬기면 벌 받을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했기에 벌 받는다고 하는 도덕적인 개념은 없고 잘못 했더라도 우상을 제대로 섬기면 괜찮을 것이고 잘못 섬기면 벌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만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관념이 없습니다. 선거 앞두고, 사업의 큰 일 앞두고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 – 똑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옳고 그른 것은 상관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사업에서 큰 것 해낼 수 있을까? 이것에만 관심하니까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지요. 도덕성이 없습니다.

(4) 우상숭배에 있어서 더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신비(神秘)에 대한 숭배”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게 보이면 그 앞에 절하는 것입니다. 바위가 이상하게 생겼으면 ‘저 바위가 보통이 아니야’가 아니라 ‘보통이 아닐꺼야’에서 시작해서 절하기 시작하는데 나중가서는 확신에 차서 ‘대단하다’하면서 절한다 이겁니다. 나무가 오래되었으면 나무에 절하고 하다 못해 둥글게 떠오르는 달을 보며 애기 낳게 해 줄 것이라면서 절합니다. 좀 신비스럽다하면 다 섬깁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보다는 보이는 형상을 더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숭배하는 것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 시내 산으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밑에서 자기들은 여기까지 이끌어낸 신이라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제사하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금송아지가 더 실감난다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우상을 더 실감나게 신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해서만은 하나님이 쉽게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책망하시고 벌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대용품으로 우상을 세워놓고 끊임없이 엎드려 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없이는 못살 것 같이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도,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 우상숭배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숭배 사이를 방황하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쓰스와 허메라고 여겨 소 잡아 제사 드리고 화관을 걸어 주겠다고 루스드라의 원주민들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나서자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2.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고 소리쳤던 이유?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소리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두 사도는 그 말을 듣자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신성모독에 개한 강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이야기 생각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사건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베드로가 들어왔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신의 사자나 되는 것으로 알고 그 발아래 엎드려 절합니다. 발아래 엎드려 절했다는 것은 신하가 황제 앞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평범한 인사가 아닙니다. 그때 더 놀란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얼른 일으키면서 말합니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다’ – 이 말은 ‘나는 신이 아니다’는 말인데 참 중요한 선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현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신이 되려고 합니다. 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독재자는 접어두고 사람들 마음 바탕에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잇습니다. 꼬집어 얘기하면 신이 되려는 욕망입니다. 다스리고 싶은 욕망, 지배하려는 욕망,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돈으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권력으로 지배하려 합니다. 때로는 주먹으로 지배하려 합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드물어도 무엇이든 남을 가르치는 것은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인데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이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적 본성이 무엇입니까? 죄 성과 연약성 아닙니까? ‘나도 당신처럼 죄인입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는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 성 이나 연약성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온전 함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실수도 하고 죄도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적나라한 자기고백입니다.

예화) 영국 런던에서 어떤 사람이 장난치려고 저명인사 50명을 골라서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다 탄로가 났으니 속히 도망가시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거의 모두가 도망가 숨더랍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저명인사라도 뭔가 밝혀지면 부끄럽고 곤란한 감춰진 비밀이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우리 속담에는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나 바울에게서 보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겸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본문의상황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사람을 일어나 뛰게 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굉장한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능력을 보여줄 때 – 대단해 보였겠지요? 그러니까 어깨에 힘도 주고 목에 힘이 들어갈 만 한데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기적적인 역사가 자기들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거나 자신들이 온전한 인격, 흠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뭐라 했습니까?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육개월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야고보5:17-18)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기도하니까 비가 안오고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 했습니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일의 근원이 하나님이셨음을 알았기에 겸손하게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렸습니다. –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 됩니까? 그럴수록 하나님 영광 가로채지 마세요.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가로채다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잘되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겸손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귀하 쓰십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3.바울과 바나바에게서 배워야할 교훈은?

바울과 바나바가 하고 싶었던 일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선전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이나 명예를 얻고자 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에 모든 것은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만 집중 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하여 그것으로 자신들을 섬겨주기를 원했거나 이익의 도구로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바랬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생각이 같았을까요?

“15)…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소 잡아 제사하고 꽃을 걸어 주려는 사람들을 만류하면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앉은뱅이가 일어섰던 사건도, 모두가 우상숭배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 –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세상 사는데 가져야 할 결심과 행동은 한결 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기에 “우상을 버려라” 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 우상을 버려야 합니까? 우상 숭배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신앙이 자라지 않아요. 우상 숭배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기복신앙화 될 소지가 많아요. 우상숭배는 무엇에서 온다구요? 욕심입니다. 탐욕입니다. 욕심과 탐욕을 이루려는 마음이 내게 잇는 이상 신앙은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또 하나 왜 우상을 버려야 합니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에.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과거처럼 신상에 절한다거나 지성으로 다른 것을 섬기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우상에 많이 젖어 있어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간혹 점치러 가지요? 한번쯤 ? – 양다리 걸치지 마세요. 하나님 속이지 마세요. 이사하면서 날 받는 사람, 결혼하면서 어디 가서 날 받는 사람 – 간혹 있지요? 아직도 생사화복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온전치 않은 사람들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우상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질투의 하나님. 출애굽기 20:5보면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嫉妬)하는 하나님인즉”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귀히 여기고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시거니와” 무서운 말씀이지요. 때로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어요. 자녀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싫어합니다. 자녀 때문에 신앙생활 소홀히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녀를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내 욕심대로 키우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키우세요.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자녀에게는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귀신이 나가서 청소 깨끗이 해 놓았더니 더 많은 귀신이 들어와 신나게 살았다는 얘기 아시지요. 우리 마음에 우상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나면 더 지독하고 많은 우상들이 다시 들어올 확률이 많아요. “하나님 중심” 바로 선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란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로,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피곤한 삶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가장 행복한 생활입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잘못하는 백성, 하나님 등지고 우상 섬기는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15절에 이어 본문 16, 17절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지요? 15절은 창조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절을 계속 봅니다.”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만난 엉뚱한 사건에서 배워야 할 신앙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겪는 많은 일들 속에서 -때로 위대한 일, 기적을 경험하는 중에서도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야 합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중에 혹 우상에 물들어 있지는 않는지 매 순간순간을 점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복된 생활 될 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고 귀히 써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