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8 월 3 일

“사도들이 표적을 일으키다”
사도행전5장12절~16절

사도들이 성령에 붙들림으로 인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이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데 지금까지 사도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상종치 않게 되었고 백성의 칭송은 날마다 더 하여졌습니다.

1.사도들의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 게 됩니까?
초대 교회의 특징은 사도들의 활동입니다. 사도는 초대 교회에만 존재했던 특수한 직책입니다. “사도”(ajpovstolo”)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권대사, 혹은 대리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기록하고, 바른 교리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특별한 기적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신약 성경이 다 기록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떤 교훈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이단과 같은 거짓 도리를 전하는지? 참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참 사도의 표식으로 특별한 기적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기적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사도들만이 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기적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입니다.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능력입니다. 셋째는 축복과 징벌을 나타내는 통치권의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기사”란 말은 “tevra””(테라스)인데, 기적 혹은 驚異(경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shmei’on”(세메이온)인데, “표시, 증표, sign”라는 뜻입니다. 즉, “이 사람이 참 사도요!” 하는 표식입니다. 아나니와 삽비라의 거짓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도 이런 사도의 표식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적 증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별 계시인 성경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없을 때에는 무엇이 바른 복음인지, 무엇이 잘못 된 가르침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전하는 것이 참 하나님 말씀인지 구별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성경이 다 기록된 후에는 그런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성경에 다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사도적인 특별한 증표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기적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몇 가지 면에서 사도들의 기적과는 다릅니다. 첫째로, 사도적 증표로서의 기적은 사도들의 의도대로 행해졌습니다만, 오늘날의 기적은 목사의 의지로 행할 수 없습니다. 미문 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보세요. 환자 자신은 자기 불구를 고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베드로 사도의 의지로 고쳐주었습니다. 대상자가 원하든지 말든지 사도의 뜻대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기적은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날의 기적은 본인의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목사도 주님이 주신 권위로 안수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안수를 받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열려진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은혜 시대의 특징은 본인의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고 나오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신유의 능력도,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영적 권세도 내 자신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표적은 기적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통치권이 더 중요한 능력입니다. 앞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지요? 병 고치는 능력,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축복과 징벌의 치리권. 이 가운데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사도적 증표로서의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위로 교회를 치리하는 권세는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천국 열쇠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으로 천국 문을 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매고 푼다는 말은 사도의 치리권, 즉 권선징악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치리권에 의해 교회의 질서가 세워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직분이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불순한 자가 제거되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각 지체들이 자기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는 초대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2.초대교회는 건강한 교회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건강한 교회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원합니다. 덩치 큰 교회가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가 좋은 교회란 뜻도 아닙니다. 크든지 작든지 건강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참 사도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교회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잘 연결되고 연합된 교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교회를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요? 병든 징표가 있듯이, 건강해도 증표가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건강한 교회로서의 두 가지 증표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쭉정이는 밀려나고, 알곡은 모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알곡이 모이는 것이 건강한 교회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병든 교회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쭉정이 교인이 모여듭니다. 말씀을 보세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3-14) 참 교인들이 믿고 모여들었습니다. 반면에 쭉정이 가짜들은 교회에서 떠나고, 멀어지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누구입니까? 믿음 없는 겉모양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예배에는 관심 없고 봉사활동만 하는 신자,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각 않고 인간적 교제만 하는 신자,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신자. 이런 사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늬만 신자를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교회 밖의 박해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하나님의 두려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교인들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나는구나!” 그래서 교회를 두려워하고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도태된 것은 물론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쭉정이를 밀어냅니다. 가짜를 도태시킵니다.
반면에 참 성도들은 가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교회 안에 가짜 신자도 있었구나! 가짜는 벌을 받는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신자들이 더러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보면서 두려워졌습니다. “불순한 신앙은 하나님이 거부하신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그래서 잘못을 고쳤습니다. 신앙이 더 순수해졌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알곡이 더 모이는 교회인가요? 아니면 가짜가 모이고 알곡은 흩어지는 교회인가요? 면역력이 없는 사람은 각종 병균이 나타나면 이기지 못하고 감염됩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졸아들고 위축됩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는 다릅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더욱 강해집니다. 모이고 응집됩니다. 바로 이런 교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가 어디 있나 해서 찾아다닐 일이 아닙니다. 오늘 내 손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특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건강한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교제합니다. 또한 각자 맡은 직임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충성심 없이 떠도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건강한 교회를 만들 자격이 없습니다.

둘째로, 죽는 자와 사는 자가 분명이 구별되고 나뉩니다. 어정쩡한 교회의 특징이 뭡니까? 교인들이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지옥에 갈는지 잘 몰라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참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생과 사로 구분해 놓습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과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맛 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18,36)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으로 나뉘게 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복음에 접근하지 못한 자, 영적 사망자들의 대표자입니다. 반면에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각종 병에서 놓임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 복음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참 복음을 갖고 있다면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먼저, 믿고 생명에 이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격이 변화됩니다. 삶이 건전하게 변합니다. 반면에 복음을 거부하고 부딪쳐 죽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헤롯 등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결과 역시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생명 구원의 증표를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3.믿음에 따른 기적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 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그림자입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눕히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5-16) 베드로의 그림자가 굉장한 기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혈루증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4) 사도 바울의 손수건만 갖다 놔도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2) 그러면 옷자락이나 손수건, 혹은 그림자들이 다 무슨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가 기적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기적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나, 교황이나, 교단장, 목사와 같은 직책이 기적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예배나 기도, 혹은 찬송이 기적의 능력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옷자락이나 손수건 그림자가 무슨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한 때 주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행했던 그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거절당한 사람입니다.(고후12장) 자기 병도 못 고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손수건이나 그림자가 어떻게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만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림자에 닿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베드로 사도에게 안수를 받고 싶어 하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손이 내 몸에 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 사도의 손수건을 가져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사도의 손을 만져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간절한 믿음입니다. 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주님의 종들을 믿고 만져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기적을 만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6, 16)

사도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도구 삼아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각자 연약합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기적을 만드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첫 번째 박해 직후에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의 기도가 뭡니까?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29-30) 이 기도대로 주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베데스다이십니다. 연못가에 앉아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는 환자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5:7-9) 예수님을 만난다면 연못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환자들이 갈망하는 베데스다이십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가 뭡니까? 바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건지시고 지켜주실 진정한 생명의 그림자이십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121:5-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기적을 우리는 얼마든지 환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