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8 월 17 일
“일곱 일꾼을 택하다”
사도행전6장1절~7절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신자가 늘어가고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헬라 파 사람들로부터 구제와 봉사가 균등하지 않다는 원망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교회를 받들고 봉사하는 직무를 전문화하여 분담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성경에는 그 내용과 절차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군들을 뽑으실 때마다 기준을 세우셨는데 초대교회도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1.초대교회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는 유대 땅에 살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들을 히브리파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 땅에 살면서 명절을 지키려고 고향에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헬라파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신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히브리 파 신자들과 헬라 파 신자들 사이의 이질감과 자기파들을 먼저 챙기는 파벌 의식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 파 신자들은 대대로 유대 땅에 머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리 파 신자들은 아람어 대신에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생활 습관 곳곳에 이방적 요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민의식이 뿌리 깊은 히브리 파 사람들이 헬라 파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헬라 파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든 일이 터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진 사람이 자기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매일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주도권을 히브리 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 파 과부들을 먼저 챙기게 되었고, 이에 소외된 헬라 파 과부들이 불만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자칫 교회가 분열될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네 인간들의 기본 속성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 모이는 동문회다, 같은 지역 출신끼리 모이는 향우회다,
같은 자손끼리 모이는 종친회다, 심지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호회다… 각종 유유상종의 모임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교도 갖고 나눔도 갖는 것은 우리 삶에 활력소가 되고 공동체의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배타적인 모임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우리끼리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나름대로의 담장을 높이 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끼리끼리 문화 또는 패거리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하고 가깝다고 먼저 챙겨주고, 우리 사람이라고 봐주고… 물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이것이 지나치면 문제입니다.마 12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밖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 와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러시면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 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는 개방적 공동체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담장이 없습니다. 그 어떤 패거리도 그 어떤 끼리끼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챙겨주고, 모두를 아껴주는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이런 개방적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안에 모두가 형제요, 모두가 우리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를 소외시키거나 누가 특권을 누리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끼리끼리 문화, 패거리 문화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 문제에 몰두하다 보니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성경 2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하다가 말씀 전하는 일, 기도하는 일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내에 말씀의 역사가 약화되고 영적 역사에 큰 짐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장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에 장애가 옵니다. 기도 소리가 줄어들고, 찬양 소리가 힘을 잃게 됩니다. 말씀의 역사도 현격하게 약화됩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의 공동체가 쇠퇴하고 세상을 밝히는 불꽃이 꺼져갑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생길 때 빨리 해결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문제가 깊어지고, 해결이 지연되게 되면 신앙공동체가 영적으로 큰 손상을 입게 됩니다. 우리가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편이 이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 믿음의 공동체가 큰 손상을 입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해를 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크게 봐야 합니다. 작은 일에 연연하다 큰 일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말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조 선조 시대에 조정이 당파싸움에 몰두하다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까? 나라보다도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다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정치는 어떻습니까?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나라의 발전에 저해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2.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7절을 보면 이 문제 해결 후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공궤 문제, 공동체 내의 차별 문제를 잘 극복하고 나니까 이 문제 때문에 말씀 사역에 위축되었었지만 이제 오히려 말씀의 역사가 더욱 더 왕성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더 큰 부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제사장들도 허다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잘 해결하면 오히려 큰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기회라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라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더 큰 부흥을 이루기 위한 시련일 뿐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을 택하고 직분을 맡겨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낯선 사람들입니다. 5절을 보면 일곱 명 모두가 헬라식 이름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적어도 히브리파 신자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십자가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군감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는 때론 우리가 전혀 예측 못하던 사람을 세우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를 보면 정말 주님께서 적임자를 세우셨고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를 훈련시키시고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고, 바울이 그런 사람이고, 제가 그런 사람이고, 또 여러분이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면 그를 주의 종으로 존중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일곱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이 일곱 집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신망 받는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혹 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면 더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닌가? 우리 모두가 칭찬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직분 자들 한 분 한 분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칭찬받은 이유가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고전 2:14절을 보면”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영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잠 9:1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분별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사리사욕과 인간적인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일처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사람 모두가 헬라파 사람이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이것은 히브리파 사람들이 크게 양보한 결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습니다. 즉 앞으로 모든 구제와 공궤하는 일은 전적으로 헬라파 사람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적으로 히브리파 사람들이 맡아오던 일입니다. 돈이 관련된 일이고 재산이 관련된 일입니다. 큰 양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 해결의 포인트가 바로 이것입니다. 양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히브리파 사람들이 기득권을 대폭 양보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양보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자기 기득권을 주장하면 모두가 다 망합니다. 그러나 양보하면 모두가 다 살 수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이 양보 정신을 우리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양보를 받은 헬라파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이 헬라파이면서도 히브리파 과부들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투쟁의 결과로 구제할 권한을 얻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섬길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또한 문제 해결의 또 다른 키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이야기입니다. 벌판에서 영국군 1개 소대가 포위당한 채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 때 소대장이 자기 수통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1개 소대원이 돌아가면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수통 한 개는 한 두 사람의 마실 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한 개수통으로 무려 40명의 소대원들이 다 마실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서로에 대한 배려로 정말 필요한 양만큼만 마셨던 것입니다. 이런 전우애로 이 소대는 결국 끝까지 견뎌 지원군에게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거운 과제도 있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문제와 과제를 잘 해결하셔서 인생의 큰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3.오늘날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