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7월13일

“물건을 통용 하다”
사도행전4장32절~37절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도전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하기 어려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는 좋은 말씀이긴 한데 우리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령 충만함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초대교회의 이런 모습을 왜 기록했을까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기록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2:42절 이하의 말씀도 오늘 본문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런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초대교회는 이런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오고 오는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이런 패턴과 이런 모습을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동양교회든 서양교회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만들어야 할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원칙이라면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교회는 지금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요?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령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다음에 만들어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2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과 오늘 말씀 모두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모습이라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과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움직이셔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쓰도록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만든 결과이기에 사도들의 강요나, 압력이나, 감언이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신 모습, 그 결과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극도의 흥분과 열정에 사로 잡혀서 자기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셔서 역사하신 결과, 그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린 것이었다.”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라면 누가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물질의 나눔,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도들 발 앞에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을 다른 것이 아닌 물질을 서로 통용하고,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모두 함께 사는 사회,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서 나누면서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누가가 성령 충만의 특징으로 잡아서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유입니다. 돈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돈이 하나님을 대신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돈에 미쳐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돈만 있으면 나이를 거꾸로 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이 조금 못 생겨도 돈만 있으면 뜯어 고쳐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조차도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교회에서 힘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을 일군으로 세우고, 돈 없는 많은 사람들보다는 돈 있는 한 두 사람을 붙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돈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요, 신앙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적이 예가 무엇입니까?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어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고, 왜 이리도 일이 풀리지 않고,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만 하나? 저 사람은 교회 생활도 어영부영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 않는데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잘 나가고, 돈 잘 벌고, 자녀들 좋은 학교에 척척 들어가고.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조차 이런 문제로 흔들리고,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물질을 드리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를 달리 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물질의 많고 적음이 우리들 신앙의 좋고 나쁨과 비례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복이란 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근본 목적을 어디에다 두고 계십니까? 이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저 세상, 오는 세상에다 두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란 이 세상의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이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이요, 위로요 기쁨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나의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이 땅 위에서 이루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영원한 것, 영적인 것, 고급한 것, 가치 있는 것은 사라지고 영적인 것을 모두 땅에 것으로 대치시켜 버렸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것을 움켜쥐지 아니하고, 모든 소유를 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렸기에 그 실질의 증거로 자기들의 소유를 모두 내려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고 사로잡고 있는 재물, 물질에 대해서 자유를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우리는 땅에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오직 예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위로요, 나의 전부이다. 주께서 내 것을 원하시면 나는 언제든지 내놓겠다. 오직 주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겠다. 나의 미래와 나의 인생 전체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내가 오늘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두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온전하신 뜻을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사는 곳에서 이루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신이었고, 삶의 목표였습니다.

2 물건을 통용한 행위를 설명하여 보시오.

초대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유무상통의 모습이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따라야 할 패턴이요, 원칙이라면 그 이후의 교회의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교회는 그런 모습을 따라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능력 있고, 효과 있게 선포되고, 가르쳐졌던 종교개혁 시대에도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가 있었던 시대는 비상의 시대요, 비상의 때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위협을 무릅써야 하고,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일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것이 경제적인 억압과 위협을 감수해야만 하는 때였습니다. 그 비상의 때에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능력 있게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어려움 없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며,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하게 드린 하나님의 사람들로서의 삶을 그런 방식으로 살도록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배워야 만 하는 교훈은 성령충만 이란 단지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린 자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시켜야 하는 원리입니다.

신앙은 억지로 만들지 못합니다. 흉내를 낼 수 있고, 모양은 따라 할 수 있습니다. 흉내를 내고, 모양을 따라 함으로 내면이 바뀌고, 생활이 바뀔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내 안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시고, 갈등하게 하십니다. 내가 거부하고, 투정을 부리고, 반항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고, 오래 기다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 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냐? 너는 왜 따라오지 않느냐? 너는 왜 기도도하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지 않느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오래 기다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한두 번 말을 해서 안 듣는다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한두 번 말해서 돌이킬 수 있는 존재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오래 참으시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시면서 설득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런 자세를 갖고 대해야 합니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긍휼과 자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마음을 움직이시고, 설득하셔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리도록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다리몽둥이 부러뜨려서 하나님께 항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통용할 때 많이 가진 자라고 해서 거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없는 자라고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진 자들이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쉽게 욕을 먹는 사회입니다. 가졌다는 것을 조금만 티를 내도 사람들이 금방 발끈하는 것이 한국 사회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재능이든, 심지어 믿음이든, 성경지식이든, 체험이든, 무엇이 되었든지, 있는 사람들이 더욱 조심하고, 더욱 신경을 써야 하고,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에게 밥을 사줄 때에도, 물건을 선물할 때도, 헌금을 할 때도, 내가 가방을 사고, 가구를 사고, 무엇인가를 할 때에도 절제해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산다. 내 것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가 뭐 때문에 다른 사람 눈치보고 사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당한 것이 아니라 무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도 꼴불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부유함까지 없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교회에서 일을 하지 못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교회 안에서 할 일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할 마음도 없다. 그것은 핑계요 게으름입니다. 이렇게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있는 사람들을 긁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들이 저 따위로 행동한다고, 저 따위로 행동할 거 기도는 뭣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나? 가진 것들은 항상 저렇게 잘난척한다니까? 눈꼴사나워서 못 봐주겠네. 그렇게 비아냥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거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십시오. 돈 자랑하려고 밥 사준다고 하면 튕기지 마시고 맛있게 얻어먹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모두 참으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웃어주고, 오래 기다려주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고, 그것이 성령 충만한 것이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은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복음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발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함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이런 놀랍고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된 다음에 만들어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놀라운 모습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더욱 능력 있게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었고,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선교 공동체로, 증인들로, 세상과는 다른 대안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요, 우리가 세워가야 할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 자신을 주께 온전하게 드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내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린 자로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 자랑하십시오. 말에나 일에나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모든 일을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과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세워가십시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더욱 절제하며, 포기하며, 상대방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온유와 겸손으로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욕심과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삼지 말고,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늘에 두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우리는 오늘 날 어떻게 초대교회를 본 받을 수 있나? 내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