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6 월 8 일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사도행전2장43절~47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1. 초대교회 공동체의 몇 가지 특성을 살펴봅시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교제를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몇 가지 특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한 내용들이 모두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교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표적, 물건의 통용, 소유의 분배, 떡을 뗌, 하나님 찬양은 외적으로 드러난 교제의 표현들입니다. 교회의 거룩 성과 보편성은 성도들의 교제에 있습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의 교제로써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여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 세상이 믿게 할 만한 공동체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 압제 당하는 세상 구조를 구할 만한 산 위에 세운 성이 되어 있는가? 우리도 예수처럼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분담하며 짐을 져주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 세상에서 성별되어 ‘이 세상 것이 아닌’ 그런 사람들인가? 직장생활, 정치생활, 성공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공동체인가? 우리의 삶의 표준은 그리스도적인가?, 아니면 이 세상 적인가?”
그러면 성도의 교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함’이란 뜻인데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것은 관련을 맺고 사는데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관련을 맺는 것이 곧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시간과 죽음을 넘어서는 교제’요, 현실의 역사에서 ‘연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폴 투르니어 박사는 그의 책 “고독으로부터 도피”에서 오늘 현대인의 삶을 대표하는 고독한 한 여성의 삶을 소개 합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비서로 일하는 한 외국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라디오에서 그 날 하루 방송을 마감하는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 “오늘 밤이 당신에게 행복한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잠이 들곤 합니다.
그는 이 복지기관에 와서 근무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의 상사를 비롯해서, 그 사무실에 찾아오는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많은 사람을 대하지만 하루 생활 중 인간적인 대화는 그 날 라디오 방송 종료 시간에 듣곤 하는 아나운서의 인사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사무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많은 말을 듣고 살지만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독은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투르니어 박사는 현대인의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정신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의회주의 정신, 독립의 정신, 소유의 정신, 요구의 정신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병든 정신을 극복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혁명입니다. 먼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성도의 교제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그들의 혼과 영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히12:1)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미 영원의 시간 가운데 들어가 있는 많은 증인들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이 살아간 삶의 모범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그들이 닦아놓은 영성의 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데 좋은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언자들, 사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성서의 인물들이지만 언제나 현재 살아있는 사람 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 킴퍼스, 성 프랜치스코, 마틴 루터, 존 칼빈, 요한 웨슬레 같은 성인, 개혁자들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과 종족, 문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해서 갖는 교제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머리 둘을 가진 어린아이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입니다. 그 아이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하는가? 둘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랍비가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넣어 한쪽 아이 머리위에 부었을 때 동시에 다른 아이도 울면 하나고, 그렇지 않고 한쪽 아이가 울지않고 웃으면 그때는 둘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유대인이 고통을 당하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서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 자매들로서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서로 흩어져 있지만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의 기도로 영적 교통을 갖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의 연대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 의인들에게 예수께서 자신이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헐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의인들이 언제 자신들이 그렇게 하였느냐? 고 물었을 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 25:31∼46)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교제에 포함됩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라우렌티우스의 전설을 소개하겠습니다.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는 초대교회 집사로서 로마에서 빈민을 구호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종사했습니다. 258년 기독교 박해 때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하늘의 보화를 관리한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그 보화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돌아가서 그가 돌보아준 사람들 중에 병인들, 불구자들, 마비된 자들, 절룩거리는 사람들, 간질병 환자들, 나병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그들과 황제 앞에 나아갔습니다. 황제께서 탐내는 황금은 수많은 범행의 원인입니다. 그 빛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진짜의 보화는 세계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황제의 눈에는 이들이 비참함 무리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교회의 보화이고, 교회의 금, 진주, 보석입니다. 황제는 라루렌티우스를 쇠 격자에 묶어 숯불로 천천히 구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고통을 거두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의 교제의 방향을 지시합니다. 성도들의 공동생활이 어떤 현실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시사합니다. 기독교인의 연대적인 형제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이야기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초대교회는 서로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살고 존재한다. 거기에는 모두를 위한, 즉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가 있다. 이 형제적인 공동체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한 공동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가 있는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차별 대우를 받은 자들에게 구속력을 지닌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 이들은 교회의 보화들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교제에는 하나님과 교제가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와 교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 교제는 이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교제입니다.
시인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한가지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 영원으로 인도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성도의 사귐의 약속의 현실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가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에는 성도의 사귐의 신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1) 이 성만찬은 거룩함에 참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운명, 성령의 사건에 참여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2) 이 성만찬에서 우리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3) 이 성만찬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사랑의 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믿음의 신비인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이 성도의 교제에서 새로운 희망의 삶을 내다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의 해답에 대한 제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온전한 교제의 삶을 희망 가운데서 기다리게 됩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엄연한 사실이다. 권력을 갖기 위한 몸부림과 자기 주장의 요구는 가정과 직장, 정치, 경제 사회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사회는 고통과 싸움, 그리고 패망과 죽음의 신호 아래 서 있다. 이 모든 것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에서 그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해답의 일부’라고 말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승리를 전할 해답은 신약성경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주어진 해답의 일부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고백에는 바로 그러한 교제에 우리의 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오늘의 인간 소외 현상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활혁명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 반면에 우리를 더욱더 소외의 늪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시대의 날로 증가하는 가정 붕괴, 가정의 역기능 현상은 인간생활에 가장 필요한 사귐의 능력을 상실해 가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란?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장로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대 교회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답니다. 교회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식을 해줄 수가 없었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주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천국에 올라가 주님 앞에 108개 교회의 허물을 기록한 두툼한 노트를 펴놓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그 사람의 허물이 적힌 수십 권의 노트를 던져주시지는 않았을까요? 그의 후손은 얼마나 불행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상향의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이상향의 교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모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는 개척교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크게 10가지의 특징이 나옵니다.
1) 패역한 세대 속에서 부름받아 구원받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였습니다./40,41,42 2) 가르침 받은대로 구체적으로 서로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42,44절(함께 있어, 통용하고)
3)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42,46
4)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42
5) 봉사하는 일에 헌신된 교회였습니다./45
6) 찬양하는 일에 열심인 교회였습니다./47
7)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
8) 치유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43
9) 온 백성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47
10) 그리고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져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47
오늘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가지로 오늘 본문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A.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졌습니까?
1)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2)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42
3) 기도하기를 전심 전력을 다했습니다./42
4)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했습니다./47
B.우리 교회도 이런 부분에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교회에서 모이기를 힘써 축제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크게 예배, 교육, 교제, 선교(전도), 봉사(구제)라는 다섯 축이 있습니다. 모두가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순위가 예배입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느냐 적게 모이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가 모이느냐 가난한 사람이 모이느냐?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모이느냐? 학식있는 사람이 모이느냐? 좋은 프로그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가 하나님게 영광드리는 예배이냐 사람들의 잔치이냐가 문제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2) 실제적인 제자 훈련이 이루어져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변화된 11명이 당시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도 변화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실제적으로 변화된 제자를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능력있는 기도로 응답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할 때 응답받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의 감격을 가지고 찬양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형식에 치우쳐 얼어 붙은 교회가 아니라 늘 복음으로 활화산처럼 기쁨의 감격을 가지고 찬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할 때 기쁨이 솟고 찬양할 때 마음에 참된 평강이 깃들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할 때 간수가 회개하고 기적이 나타났듯이 찬양을 통하여 삶이 변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들이 성전에 모여 예배하였고, 무엇을 이들이 가르쳤고, 왜 이들이 기도하고 찬미하였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인정받는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배하고 교육받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교회는 누가 세웠습니까?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같이 예배하며, 같이 찬송 부르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말씀 듣고 아멘하고, 같이 할렐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존경받을 이가 있다면 예수님이요, 대접받을 이가 있다면 예수님이요, 영광 받을 이가 있다면 예수님이요, 예배 받을 이가 있다면 그분도 예수님이시요, 찬양받을 이가 있다면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2.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이냐는 것입니다.
A.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1)서로 교제 하며 떡을 떼었습니다./42
만났다 설교 듣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옆에 누가 않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말을 붙일까 조마조마 하면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기둥 뒤에 숨어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2)진정한 나눔이 있었습니다./44.45
성도의 교제를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교제의 근본정신은 그리스도가 머리라면 우리는 몸이요, 몸의 각 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몸의 각 부분은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를 아낍니다. 그들은 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하지 않고 스스로 내어 놓았습니다.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교회는 주님과 생명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한 몸이 될 때 바로 그 모습이 교회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3)많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47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 충만 입니다. 인격 자체가 성령의 지배를 받은 것입니다. 내 인격을 성령이 온전히 지배해 버리면 이타주의가 될 수 있고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합니다.
B. 우리 교회와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한 가족처럼 헌신적인 사람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9-22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남남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한 식구라는 말입니다. 한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새 식구가 들어 올 때 마치 어린 갖난 아이를 돌보듯이 돌보아야 하고 온 식구가 새 식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에 끼워 달라고 할 정도로 부러운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나누고, 물질이 있으면 물질을 나누고,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미소로 말로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교인을 라이벌로 생각합니다. 거래자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용자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3.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교회,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A. 오늘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 사회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쳤습니까?
1)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43 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까.
2)교회와 가정의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46
3)백성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47
4)믿는 백성들이 날마다 늘어났습니다./47
B. 우리 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세속적인 교회 – 이 세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에는 세상 풍속과 욕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모방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인본주의입니다. 황금만능주의입니다. 쾌락 지상주의입니다. 과학 만능 주의입니다. 과정의 윤리를 상실하고 세상 방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만 잘되면 되는 것입니다. 직분은 벼슬이 됩니다. 외식과 독선이 가득 차게 됩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합니다. 내 교회밖에 모르는 이웃에 대한 섬김과 나눔을 잊어버린 집단 이기주의가 횡행합니다.
(2)분리된 교회 – 세상이 싫다고 자신들끼리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만 잘되면 됩니다.
(3)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선도하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더러워진 사회를 정화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모방할 수 있도록 하고 사회가 교회를 추종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요약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세가지입니다.
(1)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2)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3)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1)먼저 약한 자에게 관심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당한 자 등 약자를 향하여 구제의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지역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베풀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교회가, 구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2)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를 향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큰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자선단체는 아닙니다. 영혼을 살리는 영적 병원입니다. 그들에게 물질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이 변화될 때 사회의 물결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1)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2)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1.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로 만듭시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1) 구원에 감격하여 교회에서 모이기를 힘써 축제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이 실제적인 제자 훈련을 통하여 재 생산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와 감격의 찬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한 가족처럼 헌신적인 사람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3.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속주의 화 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약자를 도와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와 구제에 헌신된 교회이어야 합니다.
3.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