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2월 7일

바나바와 사울이 구브로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3장1절~12절

안디옥교회는 기독교역사상 처음으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비량으로 일하면서 선교한다고 스스로 선교사라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 선교사는 반드시 파송한 교회나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1. 안디옥교회 첫 선교지 구부로는 어떤 곳이며 어떻게 선교 하였습니까?

안디옥교회는 기독교역사상 처음으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비량으로 일하면서 선교한다고 스스로 선교사라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 선교사는 반드시 파송한 교회나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대화할 때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 어느 교회에서 파송했습니까?” 파송하고, 기도하고, 때때로 보고도 받고, 또 선교방향과 정책에 대해 협의도 하고 지도도 받는 것이 선교사입니다. 보낸 자와 보냄 받은 자가 언제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협력하고 후원할 때 선교의 결실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선교사로 보낼 때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합니까? 한마디로 잘아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는 1년 동안을 안디옥교회를 충성되게 섬겼습니다. 충성되게 섬기지 않았다면 선교사로 파송했겠어요? 선교사 파송에 보다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는 교회나 보냄 받는 선교사나 모두 “성령의 역사” 하심에 대한 순종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본인이 아무리 선교사로 가고 싶다 해도 파송하는 교회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교회가 아무리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다고 해도 나갈 선교사가 없다면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나 선교사나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순종함으로 선교사 파송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어 국내에서도 목회가 신통치 않은 사람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해봐야 – 틀림없이 실패합니다. 왜? 선교의 열정 없이 선교가 됩니까? 선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도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안수하여 보내라’ 성령께서 명령하셔서 안수하여 파송 했습니다 –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4절 ”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를 출발하는 것도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 역사, 특별히 영혼구원의 선교에는 “성령”께서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 –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은 구브로에서 어떻게 선교했습니까?

구브로에서의 전도

“4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隨從者)로 두었더라” 구브로는 길리기아에서 80km 떨어진 섬입니다. 키프로스(Kypros), 사이프러스(Syprus)라고 합니다. 지중해에서 세 번째 큰 섬으로 기후와 환경이 좋아서 별장이 많기도 합니다. 옛날엔 구리광산도 있었고, 잔잔한 항구들도 많아 조선업도 성했다고 합니다. 이섬에는 우상숭배가 심했는데 특별히 비너스 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비너스 신이 미의 여신 아닙니까? 그래서 사치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살라미라고 하는 곳은 그 섬의 가장 큰 도시이고 바보라고 하는 도시는 그 섬의 수도입니다.

(1) 왜 구브로였을까요?

비록 사울에게는 낯선 곳이었지만 구브로는 바나바에게 매우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사도행전4:36절에 보면 바나바가 구브로 태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나바는 제 일차적인 선교대상지로 자기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택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선교는 아무도 모르는 곳, 아무 조건을 모르는 곳보다 이해와 정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바나바는 처음부터 예수 믿던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짐작키는 아마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 믿고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자신과 문화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곳에서 전도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만일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부터 엉뚱한 곳으로 갔다면 선교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인도 안에서 구브로로 갔으며, 그것은 대단히 지혜로운 선택이요 결단이었습니다. 복음전파는 자신과 연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가족 중에 예수를 믿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전도는 가족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면 그 친구부터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안드레가 바돌로매에게 예수님을 전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바돌로매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며 의심을 품었지만 안드레는 자신의 친구였던 바돌로매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안드레의 마음은 친구 바돌로매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데에 뜨거워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이 여러분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2) 구브로에서 어떻게 선교했습니까?

오늘 본문은 성경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살라미와 바보에서 전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살라미와 바보는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와 사울은 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했을까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전도의 열매를 맺는데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전도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전도는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실이 있을 곳에서 전도해야 힘을 얻고 열정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5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면 살라미에도 이미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전도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살라미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그곳에 사는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현지어와 유대인말을 동시에 구사했습니다. 현지어를 모르는 바나바와 바울이 원주민에게 직접적으로 선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지어와 유대인말을 구사하는 유대인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원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상당히 지혜로운 전도자였습니다.

전도는 단순히 신앙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러나 좀더 효과적인 전도는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합니다. 선교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수집해야 합니다. 현지어에 대한 유창한 실력도 필요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만큼 그에 합당한 준비도 해야하는 것이 참다운 선교의 첫걸음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구브로에 선교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을 것인가, 지혜로운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열심히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지혜로움으로 선교에 만전을 기했던 것입니다.

(3) 수종자 요한

성경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은 수종자 요한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수종자란 말은 표준새번역에 ‘조수(助手)’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요한은 바울의 생질이었고 또 마가 다락방 주인의 아들이었는데 굉장히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수종자를 두는 중요한 자기들이 효과적으로 선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시키고 양육시키면서 좋은 후계자로 삼는데에 그 주요 목적이 있습니다. 후계자를 키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후계자를 키우는 일에 매우 인색합니다. 이 자리에서 정치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치가들은 후계자에 대한 인식이 빈약합니다. 좀 괜찮다 싶으면 키우기 보다는 자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전에 제압하려고 합니다.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한 벤처기업을 후원하기보다는 대기업의 아성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압박을 가합니다. 이래가지고는 나라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경영학의 거장 피터 드러커는 ‘인재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기업의 미래를 ‘거의 전적으로’ 좌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러커 라는 석학이 쓴 ’21세기 경영의 도전’이라는 책에서 “경영자들이 앞으로 부닥치게 될 가장 심각한 도전은 지식 노동자 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떤 수도사가 황소를 타고 어느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을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소를 탄 수도사의 뒤를 따랐습니다. 두리 번 거리며 무엇을 찾는 수도사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나는 황소를 찾고 있습니다.” 뒤따르던 사람들이 기가 막힌 듯이 웃어버렸습니다. 수도사는 다른 무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도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나는 황소를 찾고 있습니다.” 그곳이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수도사는 세 번째 사람들에게 또 갔습니다. 사람들이 또 물었어요. “무엇을 찾으십니까?” “나는 황소를 찾고 있소”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황소를 타고 있는데 왜 황소를 찾는다고 하십니까?” 수도사가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으려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며 엉뚱한 방법으로 땀 흘리고 있지 않을 까요?

2. 구부로 전도지에서 생겼던 일에 대하여 설명하기

구브로 전도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만난 사람은 방해꾼이었습니다.

“6절~8절 말씀에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엘루마는 박수무당이었습니다. 아마도 돈도 많이 벌었으며 상당한 인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박수무당 엘루마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 믿으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예수를 못 믿게 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자가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고 할 때 방해자가 나타납니다. 속회가 잘 되려고 하면 꼭 훼방꾼이 나타납니다. 선교회에도, 찬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다된 밥에 재 뿌리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자가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이 욥을 고발하는 장면(욥1:6절이하)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방해자를 만나면 불평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숙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해자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건축에도 방해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방해자를 통하여 욥의 전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연단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해자까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하십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 만난 인물은 총독 서기오 바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7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전도하다보면 험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해자를 만날 때 낙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수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찾는 신앙의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낯선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그를 불러들여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참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자는 듣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로마황제가 그 지역을 통치하도록 파견한 권력의 중심에 앉아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기오 바울은 달랐습니다. 낯선 전도자를 불러들여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흔히 세상 힘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은 달랐습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방법입니다. 사병보다는 사단장이 예수 믿을 때 좀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원보다는 그 회사의 사장이 예수믿을 때 전도가 수월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병보다 사단장이 복음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병이나 사단장이나 사원이나 사장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모두 공평하게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전도의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사병보다는 사단장이, 사원보다는 사장이 예수 믿을 때 전도는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영향력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전도는 훨씬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9절을 보면 바울이 성령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했던 바울은 당시 재물과 인기를 한 몸에 안고 있던 박수무당 엘루마를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성도들은 매일 매순간 영적인 싸움을 치루고 있습니다. 이 영적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성령충만 입니다. 가정의 문제든, 직장의 문제든, 질병이든, 어떤 문제에도 성령충만 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주목하고 똑바로 쳐다보고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꾸짖었습니다.
10절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악한 세력이 다가올 때 뒤로 피하기만 하면 계속 밀리게 됩니다. 우리가 악과 싸울 때 일방적으로 피하거나 몰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악한 세력과 정면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는 하만의 계략에 맞서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라고 담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들어논 나무형틀에 하만이 달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하만과 유대인들을 시기하는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악한세력에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정면으로 대항한다면 승리는 현실이 됩니다. 에스더의 담대함과 같이 바울이 박수를 꾸짖고 저주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저주한 순간 박수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결과 12절”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악한세력과 당당히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비난을 피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의기소침할 필요없습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다”라고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박수무당을 꾸짖었던 바울처럼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에스더와 모든 유대인들이 살아났던 것처럼, 그리고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된 것과 같이 여러분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3. 바울이 된 사울의 이야기를 해보자.

9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 말씀을 시점으로 해서 결정적으로 사울이 바울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계속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름이 왜 바뀌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바울의 회심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회심 전에는 사울이었고, 회심 후에는 바울이라고 합니다. 회심 전 사울은 율법중심이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회심한 이후에 바울로 이름이 바로 바뀌어야 하는데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데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뀐데에는 선교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헬라말, 사울은 히브리말입니다. 동일하게 게바라는 말은 히브리말이고 베드로는 헬라 말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똑같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전파를 앞두고 히브리 식 이름인 사울에서 세계공용어였던 헬라말 이름인 바울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사울은 ‘큰 자’, 바울은 ‘작은 자’ 라는 뜻에 착안하여, 예수 믿기 전에는 큰 자였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작은 자로 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의미 있는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어떻든지 중요한 것은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예수 오래 믿어도 변화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증거는 변화에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 그 사람의 믿음정도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수준은 그가 얼마나 변화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신의 옛사람에서 벗어나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셔서 영혼구원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선교하다보면 방해꾼, 대적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대적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승리는 그들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되어 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감동과 은혜와 감당하는 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지혜와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모하고 힘써야 할 일은 능력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받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