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1월 9일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다.
사도행전11장1절~18절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백부장 고넬료 에게 복음을 전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베드로는 사도들과 그의 형제들에게 가아사랴에서 되어 진 고넬료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가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예루살렘에 있는 할 례자들이 베드로를 힐란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할례가 없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느냐“ 고 베드로를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1. 오늘 말씀의 1절~16절까지는 삶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모두가 원하고 있지만 그렇게 쉽지 아니하여 슬퍼하고 분노하며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날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 경제적인 조건, 환경 탓도 있겠으나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만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할 가족까지도 어느 날 조그마한 갈등이 불씨가 되어 큰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즉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여러 가지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만큼 모범적인 교회가 없습니다. 친교와 예배 상부상조하며 사는 정신은 오늘날 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회 본질에 충실한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고넬료의 가정 때문에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무할례자요, 이방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설교한 베드로 사도는 당시에 법을 위반했다고(10:28) 문제를 제기할 정도가 아니라 단죄하여 비난하는 말로 “힐란”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중에 수장인 베드로 사도가 그들에게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정에 가게 된 모든 일을 낱낱하고 고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기에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했을 때 그들이 이해하고 “하나님이 생명 얻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도다”하고 심한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갈등 해결의 비결을 살펴보며 은혜 받고자 “갈등을 해결하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대화가 있어야 해결됩니다. (1-16절)
고넬료의 집에서 돌아온 베드로 사도에게 할례자들이 힐란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표시로 알고 있기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은 하였으나 유대적 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할례자라는 우월감이 잔존하여 수장인 베드로 사도를 “힐란”했습니다. 이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란 말로 단순히 의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하고 비난하면서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항의에 베드로 사도가 자기의 권위로나 화내지 아니하고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였고 그들은 잘 듣고 이해하게 되어 갈등을 해결하였으니 서로의 대화가 단절될 그들의 사이에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의견이나 방법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내 입장 생각으로 저것은 아니다라고 단죄해 버리고 오해함으로 인간관계를 흩어버리고 좋았던 사이가 멀어지고 마음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대화가 없고 내 생각으로 정죄하였기에 사정도 알지 못하고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할례파 기독교인들이 전통법을 깨어버린 것 용납할 수 없었으나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오해를 풀게 된 것입니다. 10여년전 우리나라 여자 명문대학 출신 500명에게 남편과 하루에 일상적 용어 외에 10분 이상 대화하는 가정을 조사했더니 15%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부라는 이름뿐이지 서로 다른 삶이라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이었기에 다양한 삶이 있습니다. 또 문화권의 차이로 이해가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하면 서로 이해되고 자신의 잘못도 알게 되어 갈등해소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2. 온전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17절에서 이야기 해 줍니다.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해결됩니다. (17절)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임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해하고 우리와 똑같은 성령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그러기에 10:47에 세례로 주웠으니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5:29) 생각하였다 말함으로 유대인의 법으로 위법이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니 모든 것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 여건보다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모든 것도 포기할 수 있을 때에 깊은 갈등도 해결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라고 기도하시던 주님 바라보고 따라서 살아갈 때에 자신의 부족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관계가 화답하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가 양보 못할 것이 무엇이며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3. 18절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설명하여 봅시다.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한 사람이 예수 밖에서 살았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그는 원죄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의미의 회개라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의 연약함은 회개한 이후에도 이런 저런 죄를 짓게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회개(자백)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요일 1:9-10).
(요일 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회개란 단순한 후회나,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 죄를 고백하고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회개 기도를 하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감사한 일이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 볼 때 우리는 오갈 데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남을 때리지는 않았어도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내가 주일 교회에는 나왔어도 온전히 주일 성수를 못한 것,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마 22:36-38).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심으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셔서 회개의 은혜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희생은 상한 심령 곧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 이다.
회개는 확실한 용서의 위로를 얻고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갖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눅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합니다.
교회 옆에 사는 아주 방탕한 술주정뱅이가 하루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목사에게로 달려왔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꿈속에서 ‘네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는 말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목사는 ‘그러면 이제부터 술을 끊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정말로 술을 끊고 도박도 절제하면서 교회에 잘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정도 착실히 잘 나오더니 그 열심이 식어지기 시작했고 아예 교회에 발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왜 그렇게 금방 열심이 식어졌습니까?’고 물었더니 그는 ‘목사님은 그 꿈을 믿으십니까? 그건 개꿈일 뿐이라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얼마 안 있다가 그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해 걷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버렸습니다. 그날은 1년 전 꿈을 꾼 바로 그날이었습니다.(21세기 예화집) 회개는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 필요한 준비입니다.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일본에 다카바다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와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는 ‘일본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유물사관밖에는 읽으라고 장려할 만한 책이 없다.’라고 하며 <자본론>을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그는 결핵에 걸려 끝내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그는 성경과 찬송을 찾아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떠날 시간이 임박해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졌스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께로 가네. 모든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부끄러움 없이 간다네.’ 이렇게 말하고는 고요히 세상을 떠났습니다.(21세기 예화-무신론자의 임종과 회개)
회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게 합니다.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합니다. ‘유쾌하게 하는 때’는 구원의 결정적인 때입니다.
주유소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알 존슨이 20세 되던 해, 두 친구와 함께 캔사스의 한 은행을 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두 친구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또한 당시 사건을 목격한 은행원들의 잘못된 진술로 존슨은 범인으로 지목을 받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그대로 묻혀 버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존슨도 이제는 자신이 범죄자인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스천인 아가씨와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가 배달되었습니다. 평소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은 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그에게 이 책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존슨은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자신이 과거 지었던 범죄를 다시금 깨닫고, 깊이 뉘우쳤으며, ‘이제야말로 용서받을 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의 죄지은 과거를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영영 해결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주 당국에서는 범죄자가 자수를 해온 데 대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신문마다 이 일을 대서특필로 보도했고, TV 뉴스에서도 ‘알 존슨’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슨은 이 모든 상황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껏 맛볼 수 없었던 평안이 임하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속되어 처벌을 받을 줄 알았던 그는 캔사스 주의 효력 정지 법령에 의해 석방되었고, 단지 그가 훔쳤던 돈만 다시 갚으면 되었습니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귀중한 아들로서 생활하고 있다합니다. 이렇듯 회개에 따르는 것은 과거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마음의 평안과 복입니다.
참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들의 예를 따라서 하루에 세 번 기도의 시간을 갖은 듯합니다. 기도하러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혼자 있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픈 중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온갖 짐승과 파충류와 조류를 담은 그릇을 내려 보내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짐승들을 먹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의 대답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율법을 통하여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는 이 환상이 주는 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고민하던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로 세 사람의 사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이 세 사람의 도착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자들은 고넬료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베드로에게 자기들이 온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맞아들여 유숙하게 했습니다. 그는 환상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고넬료는 그의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는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 극진한 공손을 표했습니다. 들어가서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자기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만나게 된 경위를 피차 설명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의 하신 모든 일의 직접적인 목격자임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 주님은 부활하셨고, 사도들은 바로 부활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심판 아니면 구원이 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예수에 대한 그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에 내려오신 성령의 부음으로 갑자기 끝났습니다.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이 받는 이 증거를 보고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은 놀랐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방언을 말함으로 물 세례를 주고, 그들과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자 그가 본 환상과 그것의 성취,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택한 백성을 두셨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의 증언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베드로가 설교하는 동안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조차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 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 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겔 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미국 어느 동네 공장에 다니는 불량한 아들과 믿음이 좋은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공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문 앞에 외등을 켜 두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병에 들었는데 병세는 날로 더 심해졌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밤늦게 돌아와 보니 밖에 전등이 켜있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서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내 사랑 하는 아들아, 나는 너의 방탕한 생활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매일 세 번씩 기도했다. 또 너로 하여금 빛 되신 예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매일 밤 불을 켜 놓았다. 네가 예수를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천국에서 너를 만나보기를 바란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서를 읽고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하신 사랑과 기도의 감화를 받아 지금까지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진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천로역정에는 절망의 우리 속에 갇혀 짐승같이 머리카락이 자라고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이 탄식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또한 믿노라고도 하면서 회개 못한 교인이었습니다. 바로 성령이 떠나버린 절망적인 교인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주자주 감화 감동을 주셨는데도 끝끝내 복종치 않다가 성령께서 아주 떠나가 버린 절망인의 모습을 죤 번연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며 겸비한 심령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무한한 긍휼과 사유하심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세기의 어떤 랍비 이야기입니다. 이 랍비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스승의 외침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서 누가 자신의 사망일을 알겠습니까? 지금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일 년 후에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랍비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최후의식을 갖고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이고 당장 회개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 곧 회개요 회개가 용서와 위로를 받게 하며 하나님을 뵈옵게 하며 유쾌케 하며 생명을 줍니다. 이 사실 믿고 회개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