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3월15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7장1절~9절

데살로니가는 당시 인구20만 정도의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고 그 명성에 걸 맞는 잘 발달된 도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까지 갔는데 암비볼리나 아볼로니아에서 유대인도 회당도 없었던 듯합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의 거리는 160km가 넘었습니다. 바울은 교통요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얻는 유익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정확히 데살로니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2절에 세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했으니 최소 3주는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이라고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바울이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단히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살전1:3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고 1:4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교회였고 1:8에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 대단한 교회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전도했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1-4)

2절 보면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규례가 무슨뜻입니까?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자기 습관대로’ ‘자기 규칙대로’ ‘자기 스타일대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바울은 어디에 가나 자기 스타일대로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스타일/규칙은 어떤 것입니까?

⑴ 안식일에는 꼭 회당을 찾았고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안식일을 꼭 지켰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아무리 오래 여행하더라도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주일을 꼭 지켰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고 복잡해져서 요즘은 주일을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예배드리며 지키는 사람에게 하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1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규칙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바울은 안식일에 언제나 회당을 찾았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아서 회당이 없엇기에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바울은 스스로 이방인을위한 사도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무작정 길거리에 뛰어들어 아무나 붙잡고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잘 아는, 여러 가지로 익숙한 회당을 중심으로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전도했습니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먼저 여러 가지로 – 가정형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잇는지-아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합니다. 전연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입니다. 또 하나 할 수만 있으면 가족, 친지부터 전도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⑵ 회당에서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성경말씀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2…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성경을 강론했다는 말씀입니다. 강론이 무슨 뜻입니까? 희랍어 디알레고마이(διαλεγομαι)는 ‘담론하다’ ‘문답하다’의 의미가 잇는데 ‘합리적으로 따진다’ ‘마음에 확정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안식일 회당에서 단순하게 ‘예수 믿으시오” “교회 다니시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전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시오’ ‘교회에 나오시오’정도가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으며, 2000년대를 살고 잇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가 무책임한 전도가 되지 않기 위해 전도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중심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 할 수 있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예수를 전했습니까?
”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證明)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3절을 보면 바울이 행한 성경강론의 요지, 전도 설교의 핵심을 봅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 –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죄를 지적받은 자의 반응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납니다. 죄를 인정하고 예수를 믿던지 아니면 내가 무슨 죄인이냐 하면서 오히려 핍박하며 덤벼들든지.
둘째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 초대교회의 전도강령 입니다.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죽음으로 끝이라면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었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메시야라’ –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교리입니다.

⑶ 전도의 결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4절입니다.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경건한 헬라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상숭배와 인본주의에 빠진 헬라문화를 등지고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기로 개종한 사람들 –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던 헬라사람들입니다. 귀부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게도냐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여성들이 자유를 누렸습니다. 여기서 귀부인은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부인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생활이 음란하고 방탕한 로마여인들보다 유대 여인과 결혼하기를 선호했습니다. 헬라의 지성인이나 귀족 가운데도 유대여자와 결혼하기를 좋아했는데 바로 그런 귀족이나 고관의 부인들이 귀부인으로 불리었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로 교회가 서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닙니까?

2.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모습을 살펴봅시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를 받고 모두 예수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5절입니다.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저자’라는 말 – 표준 새 번역에는 ‘거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괴악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불량배들을 말합니다. 거리의 불량배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누가?

⑴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도하는 것을 듣고 경건한 헬라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으니 – 예수를 믿게 되니 반대로 유대인들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그랬을까요? 바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유대회당의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유대인들이 시기했습니다. 그러면 왜 시기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지도력이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자신들도 예수 믿으면 간단한데 그렇지 못하고 바울과 실라를 시기해서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시기의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깔려있습니다.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다면 왜 시기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 보았습니까? 열등의식 때문에 시기합니다.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이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꾸만 남과 비교합니다. 그리고 비교하면서 교만해 집니다. 나는 아무개보다 인물도 낫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아무개를 무시하고 때로는 책망까지 합니다. 문제는 현대인 대부분은(95%정도)심리적으로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도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화) 수도사가 있었어요. 마귀가 예쁜 여자로 유혹해요. 끄떡하지 않습니다. 금덩이로 유혹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당당하게 자기 길을 갑니다. 드디어 마귀대장이 나섭니다. 수도사 귀에 몇 마디 하니까 수도사 얼굴빛이 금방 변했습니다. 시험에 성공했습니다. 마귀대장이 속삭인 말이 궁금하시지요? ‘네 동생은 대주교가 되었단다.’ 동생과 형 사이도 시기와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27:18을 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자기에게로 끌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가야바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물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기가 발동되면 이성도 마비되고 믿음도 힘을 잃고 상식도 잃어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시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열등감 없애주시고 시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게 하옵소서.”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냥 동원했겠습니까? 시기로 눈이 가려지니 이제 제 정신이 아닙니다.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유의해 보세요. 시기로 가득하니 이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돕던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야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성경은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만 짐작키는 데살로니가에서 초기에 얻은 회심자 중 한사람이었을 것입니다.

⑵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

“6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여기서 읍장이란 로마 영토내 자치도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장관을 말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뜻은 로마제국에 반란을 꾀한다는 뜻인데 다른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활동에 대하여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천하를 뒤집어 놓는다.’(turned upside down) ‘거꾸로 놓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는 이들이 바울 일행을 모함하려 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딱 맞는 말 아닙니까? 예수 믿기만 하면 사람이 변했습니다. 이단사상에서 벗어났으며, 인간적인 자랑들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들의 변화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놀랐고 곧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앞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3)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이 믿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⑶ 시기가 지나치니 바울 일행을 정치적 음모로 몰고 갑니다.

“7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영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 이다 하니”
종교 깡패까지 동원해도 되지 않으니까 바울은 잡지 못하고 대신 바울이 묵었던 야손을 잡아 넣고는 가이사 이름 팔아서 정치적 음모로 집어넣으려 합니다. 유대인이면서도 가이사 임금이 있는데도 다른 임금 예수가 있다하니 이것은 로마 가이사 황제에 대한 불충이요 반란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기독교를 핍박할 때 당시 세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습니다. 8.9절을 보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 한다는 말을 듣고 군중과 시의 통치자들이 소동했지만 곧 시기 때문에 생긴 일인 줄 알고 보석금을 받고는 야손 일행을 놓아 주었습니다.

3.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4가지 교훈.

후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질적으로 참으로 우수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결코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몇가지 교훈을 나눕니다.

⑴복음 전파는 반드시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항상 예수를 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흔히 전도하라 하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시면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하나님 믿으면 평안을 얻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평안해지고 복받으려는 것인가?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평안과 축복은 예수 믿은 결과이지 목적 자체는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가르쳤고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 그 예수가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이므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 –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사람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가 단순히 ‘예수 믿으면 좋다’는 느낌 / 감정만 가지고 전도하려 하지 말고 예수가 누구신지? 왜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믿게 하는 것이 빨리 성도로서 제구실할 수 있도록 자라게 합니다.

⑵ 핍박이 오히려 복음을 더 빨리, 더 많이, 더 능력 있게 전하게 했습니다.

전도 여행에서 바울이 다른 도시로 옮겨가서 전도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리고 다음에 볼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도시에서 머물러 전도하면서, ‘이만하면 됐다’ 어지간히 전도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다음 도시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이 닥치면 ‘아, 하나님께서 다른 도시로 가라고 하는 사인(Sign)을 주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고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이 핍박 때문에 복음이 더 빨리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이 되었다고, 좀 쉬자고, 그런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미쳐 마무리되기도 전에 재빨리 다음 도시로 강야 했으니 그만큼 복음이 빨리 전파된 것 아닙니까? 그렇고 보니까 이 핍박 때문에 복음이 더 많이 전해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두곳 정도 전도할 수 있는 시간에 세곳, 네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으니 그만큼 많이 전한 것 아닙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핍박은 복음을 더 능력 있게 전하게 했습니다. 가는데 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의 능력은 결신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하면 곧 능력도 나타나게 되고 결신자도 생길 것이다 – 확신 가지시고 더 담대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⑶ 신앙생활 하다 보면 ‘사이비의 신앙’인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회당의 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종교깡패까지 동원하여 가 이사에게 반란을 꿈꾼다고 엉뚱하게 고발하지 않습니까? ‘사이비신앙’ 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 아닙니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껏 세상과 어울려 살려고 합니다. 교회 다녀봐야 별것 아니라 하면서 요즘 세상에 아무리 신앙인이라 해도 술 적당히 마시고, 담배 적당히 피우고, 오락이나 하면서 때로 도박도 하고, 기업하자면 뇌물도 주고, 이중장부도 만들고 – 성경대로 하면 다 굶어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사이비 신앙인들. – 예나 지금이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강직한 신앙을 소유하기를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숙종 때 형조판서 민 진후가 어렵게 사는 누이동생 집을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술상을 차려 내오는데 안주라고는 김치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실은 그 전날이 시아버지의 생신이었기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기로 남은 쇠고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법으로 소를 잡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오빠가 너무 강직하여 법 지키는 것이 엄함을 알고 있던 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크게 나무라지 말 것을 다짐하고 쇠고기를 구워내자 민판서는 맛있게 먹고는 문밖에 나가 포졸을 풀어 “범법을 했으니 이 집 종을 잡아가두라”고 시켰답니다. 그러고 나서 법정벌금을 민판서가 물고 종을 풀어줬답니다. 가족의 정으로 구워낸 고기를 아니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범법한 것을 묵인할 수도 없었던 민판서가 행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참으로 강직하고 투명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합시다. 하나님만 바라보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태도와 소속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맙니다.

⑷ 복음을 듣는 자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듣고 따르는 자와 부정적으로 듣고 항거하는 자 – 두 종류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따랐지만 유대 회당지도자들은 오히려 핍박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긍정적이 되세요. 신문을 보아도 뉴스를 들어도 긍정적인 것 많이 듣고 기억하세요. 어떤 사람은 신문보아도, 뉴스 들어도 꼭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들어요. 그 마음이 이미 병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교회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 명의 지파대표와 여호수아와 갈렙,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갔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시기심 버려야 합니다.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전도하고 믿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의 본이 되도록 아름답게 자라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