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과 2013년5월31일

바울이 잡히다.

사도행전 21:27-22:1

바울이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며 바울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결례를 네 사람과 함께 지키며 그 비용을 부담해서 바울로 하여금 율법과 규례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타협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에 맞게, 이방인은 이방인에 맞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 제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보니까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체포되어 죽을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전략은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략은 실패한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신앙생활하는 데는 전략이 꼭 필요한 것입니까?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왕 예수 믿으려면 고지식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너무 융통성이 많아지면 신앙의 힘, 능력을 잃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편협하게 예수 믿느냐?”, “왜 그렇게 촌스럽게 예수 믿느냐?” 이렇게 비판해도 개의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독하게 믿으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성 수하세요. 아무리 급한 일 있다 하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부터 드리세요. 주일에 예배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아직 신앙이 제대로 자라잡지 못한 것입니다. 십일조-이왕 하려면 철저히 하세요. 남에게 한 두마디 들은 것 가지고 말하지 마세요. 자녀 교육-신앙중심으로 철저히 하세요. 조금 조금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다 빼앗겨요.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녀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으니까 ‘주일만 지켜라’ 타협했습니다. 나중보니까 주일도 안 지켜요. 아닙니다. 철저하게 가르쳐 해요. 가끔 보면, 남의 얘기 가지고 자기 소신인양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자신이나 잘 믿어요. 이왕 믿으려면 ‘전략이다 적당한 양보다’하지 말고 고지식하게, 독하게 예수 믿으세요. 바울을 보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 믿으려면 처음부터 독하게 믿으세요. 새벽기도도 하고, 청소도 하고, 등…..

1.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27-29)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29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사도 바울은 바울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까지 대라는 야고보의 제안대로 성전에서 결례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힙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할까요? 성경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에베소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쉽게 알아보았지 않습니까? 에베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하던 곳이었습니다. 기적과 능력도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소란과 역경도 많았습니다. 바울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비상한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자 에베소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두려워하여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에베소에 3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에베소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전도했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은혜를 주먹으로 갚는 격 아닙니까? 바울이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인생 살다 보면 우리도 가끔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28절) 유대인은 이방인과 가깝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못할 짓 했다 이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라’ 해 놓고서는 ‘율법으로는 구원얻을 수 없다’ ‘이방인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으니,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할례 받으라’ 권한 것도 바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율법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을, 이방사람인 헬라 사람과 함께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힌 것 아니냐?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지성소와 제단, 제사장의 뜰, 유대인의 뜰(남자들만), 유대 여인의 뜰, 그리고 계단 내려가 낮은 곳에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방인들은 이방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큰 벽이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 이상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뜰 사이에는 ‘이곳을 지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된다’는 경고문도 있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방인을 멸시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이방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대 법으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형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29절을 보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 함 일러라”-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어요. 바울이 이방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성전에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울이 미웠어요. 어떻게든 바울을 없애버리고 싶었어요. 무슨 건수만 있으면 잡으려 했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니-마음 바탕에 이런 마음이 깔려 있으니 지레 짐작하고는 “옳지 됐다”하고는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리 싫어했습니까? 그리 미워했습니까?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비주류 유대인이었습니다. 히브리 파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사니 이방인과는 크게 상관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온 세계에 퍼져 사는 유대인들이었기에 언제나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제기 했지만, 직접 들고 나선 것은 히브리 파 유대인들로 추측됩니다. 그 밑바닥에는 주류, 비주류의 감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미워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철학자였습니다. 공부도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무시해도 될 터이지만 높은 학문을 쌓은 지성인이 주장하면 따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돌로 맞기도 했어요. 바울을 죽이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단순하게 신앙의 문제 만이었을까요?

우리들 사이에도 갈등은 늘 있지요? 없으면 좋겠지만 갈등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그 갈등이 서로 간에 신앙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입니까? 신앙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들도 많지 않습니까?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보다 인간성, 사람 됨됨이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유대인과 바울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감동으로 복음을 통해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구원받게 하는 바울을 유대인들은 그냥 봐 줄 수가 없었어요. 수많은 군중들을 휘어잡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왜요?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결국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시기심과 질투심-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 질투하면서 공부해요. “질 수 있느냐?” 시기 질투하면서 사업해요. 운동도 이기려고만 하니 운동이 제대로 되겠어요? 목회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해 뭣하겠어요? 마음이 잘못되면 오해하기 쉬워요.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오해한 내가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눈으로 바울을 보니까 드로비모가 들어가지도 않은 성전에 함께 있었다고 짐작하고 사실처럼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세상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여 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서기관이 되고, 장로가 되고, 그래서 교회에서 존경받게 되었는데, 한순간에 바울이 나타나서 외치니 백성들이 다 그리로 쏠려요. 그러니 볼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경계할 것 -시기질투입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신앙이 무너집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평안이 깨어집니다.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은 시기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기 질투 버리세요. 사랑하세요. 세워드리세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십니다. 명심하세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평안이 없는 까닭은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이기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은 왜 두드려 맞았습니까?(30-36)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千夫長)에게 들리매 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 지라.”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말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까요?

성전 내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성전 밖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적극적인 표현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 성전 뿔을 잡는 자는 누구도 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성전 뿔을 잡는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성전 뿔을 잡지 못하도록 재빨리 끌고 나간 것입니다. 30절에 봅니다. 바울이 성전 밖으로 끌려 나가자 성전의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구나!’ 무슨 생각했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돌 던지는 사람 뒤에서 ‘잘한다’하면서 옷 지키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울-바울 아니었습니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나왔고, 성전 문은 닫혔고, 이제 끝장입니다. 32절 끝을 보니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사들이 오기까지 바울은 두드려 맞았어요. 왜 때렸어요? 31절 보니까 죽이려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죽음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은 이미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붙잡힌다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겠습니까?

이때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사를 거느리고 소요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천부장은 로마군 1000명의 지휘관이죠.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입니다. 오순절에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세계 각 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도시에 수십 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든다는 것은 정치가들, 치안 담당관들에게 퍽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위쪽에 안토니아 탑이라고 하는 로마군의 망대에서 천부장이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해 진두 지휘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란하다는 정보가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군사와 백부장을 거느리고 현장에 당도해보니 바울이 죽도록 두드려 맞고 있었습니다. 천부장과 군사들이 도착하니 그들을 보고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33절로 35절을 보면 우선 바울을 결박하여 격리시킨 후에 이 사람(바울)이 누구며 무슨 일로 때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군대의 병영 안으로 끌고 가는데 36절을 표준 새 번역에서는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 자를 없애 버려라!’하고 외쳤다” 바울 죽이려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시기질투처럼 무서운 것 없어요. 마귀 짓입니다. 이겨 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합니다. 동족에게 맞아 죽어가는 바울을 구해 준 것이 누구였습니까? 천 부장 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천 부장 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 부장을 통해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세상 살면서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 때에 누구 구해 줍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돈이요? 돈으로 다 되는 것 같아도 못하는 것이 더 많아요. 지식요? 아는 사람이 더 답답하고 불안한 법 아닙니까? 의사요? 고치는 병도 많지만 못 고치는 병이 얼마나 더 많습니까? 위기의 때에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 성경 말씀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의 가시밭 길 같이 느껴질지라도 분명히,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천부장은 바울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21:37-22:1)

“37바울을 데리고 영문(營門)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 장 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刺客)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小邑)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위에 서서 백성들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慫慂)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41부형(父兄)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니”

영문을 모르게 되자 천부 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교양 있는 헬라어 엑센트로 말하자 깜짝 놀라 묻습니다.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 인이 아니냐?’

그후 54년 경 한 애굽 인이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 행세를 하면서 유대인들을 로마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동하여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축제기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치인과 관리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슴에 단도를 몰래 품고 다니던 4000명이 있었는데 ‘애국적 암살단’이라 칭했습니다. 유대인들 마음에 로마사람들에 대한 한(恨)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마군의 즉각적인 진압으로 흩어졌고 주모자는 몰래 도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천부 장은 바울이 바로 그 사천명의 자객을 거느렸던 애굽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길리기아의 지방의 수도 다소 태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바울 시대의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이 상당히 수준 높은 도시였습니다. 신분과 출신지역을 분명하게 말하고는 천부 장에게 말합니다. “부탁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한번 말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천부장이 기회를 주어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의 다음 본문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천부장이 오기 전까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때렸으니 온 몸이 피투성 이었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이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천지에 바울을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도 없었고, 편히 쉴 곳도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천부장이 지켜 줄 수 있고 이 영문이 쉴 곳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은 그냥 주저앉지를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천부장에게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놓고 실컷 두들겨 팼으니 그들이 승자입니까? 아니면 피 묻은 얼굴로 그들 앞에 다시 선 바울이 승자입니까?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패자입니까? ·또 하나 도대체 바울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백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너희 구원은 너희 문제다’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내 할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뚜기 처럼 일어서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사도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예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중요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내게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나 자신이 중요합니까? 묻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필요한 것입니까? 믿음의 딜레마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수준에 우리 믿음이 머문다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내 입장과 내 형편이 먼저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예수 믿는 기쁨은 언제나 절반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 접어두고, 자존심까지 접어두고, 피투성이가 되어 백성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신앙생활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때나 지금 우리의 때나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신앙을 무너뜨리고 평안을 깨뜨립니다. 시기와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천부장을 통해 바울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믿고 따라주는 자를 선한 길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백성들 앞에 선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아니었습니까? 고지식하게 예수 믿고 전하는 바울. 우리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고지식하게 신앙생활해 보세요. 신앙은 산보가 아닙니다. 확실하게 신앙 생활해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