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도는, 죄악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마음이 싹틀 때 가능해진다. 기도는, 정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상대방의 죄악을 덮어주고 싶을 때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준까지 올라가라고 하나님은 교회를 부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임박한 심판의 경고를 하셨지만, 그들에게 유죄선고를 하지는 않으셨다. 주님은 그 도시의 죄악상을 꾸짖지만 않으셨고, 그 도시를 위해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본이다.
교회를 파고드는 기독교인들의 분노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회의 죄악을 지적해 내느냐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러한 문제 구덩이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오랜동안 죄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 불평, 불만 가운데 머물면 머물수록, 그리스도의 성품으로부터 멀어진다. 일단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딱딱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가 물 흐르듯이 흘러갈 수 없게 된다.
진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당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 뵐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 안에서만 바른 태도를 유지할 수 있고, 죄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폭력에 대한 바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님이 내리시는 지시를 받은 후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인간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영성의 척도는 우리가 죄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느냐에 달리지 않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았느냐하는 데 있다. -프랜시스 프랜지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