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준비되어야 합니까?)
2.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난 다음 권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만 하면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능이란 어떤 권능을 말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권능’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힘’, ‘능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도 여기서 유래한 말인데, ‘폭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권능’이란 말은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강력한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이너마이트 같은 큰 권능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권능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가지고 전도하고, 충성하고, 병에서 고침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먹는 것, 자는 것, 세상일을 잠시 뒤로 하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10일 동안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체험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여 주의 복음을 전파하니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행8장의 빌립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광야로 가라는 인도할 때 순종하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갔습니다. 순종한 결과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던 이사야 말씀을 읽고 있던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재무장관을 만나게 되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행16장의 바울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길을 막고 마게도냐로 와서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 유럽이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신명기 34장 9절에는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을 받아 지혜가 넘치게 되자,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 운동가였던 찰스 피니(Charles G. Finny ; 1792∼1875) 목사님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순종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탄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크리스천을 무서워합니다. 악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주인을 바꾸는 작업과 사람을 얽어 놓은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의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 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시작에 불과한 일입니다. 이렇게 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외적조건이 충분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조건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마음의 문제 즉 영혼의 문제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성령강림입니다. 누가는 성령의 약속에 대해서 누가복음 마지막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누가복음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면 예언을 한다던가, 병을 고친 다던가 감동이 있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것이 성령이 오신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강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6장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보내시는 큰 목적은 첫째로 진리에 관한 깨우침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에 띄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된 사건이 아닙니다. 흔히 단정 짓는 것들인 방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병 낫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이란 말씀을 깨닫는 것이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힘이 성령강림의 목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들을 오해를 했습니다.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었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를 깨우쳐서 알게 하고 진리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모두 다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대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목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일에 대한 이상 속에서 오늘을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하면 비전과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뀝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이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되리라는 믿음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그 땅의 역사를 바꾼 ‘무사 알라미라’라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그 땅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나 목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큰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광야 어딘가에 분명히 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땅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줄기를 찾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학식이 높은 사람, 그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 관리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헛수고하지 마시오. 이 지역은 물이 안 나는 곳이오.”
그래도 그는 사람들을 모아 사막 같은 땅에서 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기진맥진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무슨 물을 찾겠다고 헛고생을 하냐며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넉 달, 다섯 달,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축축하게 젖은 모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더 파고 들어가니까 광야 한 가운데서 생수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후로도 그런 물줄기를 15군데나 더 찾았습니다.
그는 광야에 목장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 과일과 채소도 생산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키부츠(qibbutz)’라는 농장 운동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마을운동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누구든지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함으로써 불가능을 깨뜨리고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황무한 땅을 옥토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못한 것을 기적을 통해서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