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2년 6월 15일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사도행전3장1절~10절
베드로와 요한이 매일 정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성전 문 앞에 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그를 다 알고 있었다
1.오늘 말씀에 나오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여 생각나는 것을 모두 써보자
1절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 구 시”라는 말은,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분법에 의해서 제 3시, 제 6시 그리고 제 9시가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즉,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정오 12시, 그리고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6장에 보면, 다니엘을 시기하던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다리오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즉 기도하면… 그를 즉시 잡아서 사자굴에 던져 넣으십시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의 충성도 시험하고 자신의 권세도 과시하려고 조서에 어인을 찍고 금령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평소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는, 결코 망하지 않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피해가고… 어려움에 처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기도한 다니엘도 사자 굴속에 던져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니, 다니엘의 몸이 조금도 상함을 입지 아니했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듯이, 다윗도 시55:17에 보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같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식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습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직장이든지… 또는 삶의 여유가 있든지… 바쁘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성전을 향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 성전은 장엄한 헤롯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며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항상…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생활하며 하나가 되어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전은, 거의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데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세 개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성전과, 헤롯성전이 그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7년동안 지은 성전이 솔로몬 성전이었는데, 이것은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붕괴되고, 그 후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백성들을 한데 모아서 새 성전을 지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규모도 적고 볼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꿈과 소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B.C 63년경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짓밟히고 맙니다.
그 후 헤롯대왕이 B.C 20년부터 스룹바벨 성전을 수축하고 확대하여 재건하였는데, 이것을 헤롯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올라간 성전은, 바로 이 헤롯이 지은 헤롯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웅대하고 매우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화려하고 장엄한 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 옆에서 초라한 모습을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 푼만 줍쇼?”하고 구걸하고 있였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였습니다.
오늘 말씀 행3:2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말합니다.
‘미문’은 한자어로 ‘아름다울’ 미(美)자와 ‘문’ 문(門)자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문’이란 뜻입니다. 당시 헤롯성전이 화려하고 웅장했듯이 그 앞에 있던 정문 역시,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발 길이 잦았고 더욱이, 베드로와 요한이 올라 간 그 시간은 ‘제 구 시 기도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데려다 놓은 것 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현실은 매우 암담하였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이 없으면 거동할 수도 없고, 전혀 움직일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행4:22에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여년을 살면서… 하체가 마비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희망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때는 일어나 보려고…. 안깐 힘을 써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고, 30년 40년을 살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체로 하루 하루를 고통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망과 탄식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아냥도 참고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문 앞에 까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길 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서 먹고 살라고… 그를 길 거리의 거지로 방치했습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는,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와 별 다른 것이 없는, 희망이 없었던 불쌍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육신의 양식이 없어서 주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한… 영적인 걸인들이었습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시51:5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와 같이, 희망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손쓸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는, 구걸하던 거렁뱅이였습니다. 그는 평소하던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자 손을 내밀고 “한 푼 줍쇼?”하며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은과 금이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구걸하여 얻게되는 은과 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마져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한 것이 무엇 때문일까? 나로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나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우리는 의례껏 사람이 질병에 걸리고 환난이 닥치면, 죄와 연관하여 생각합니다. 물론, 죄 때문에 찾아오는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을 죄와 연관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그 명령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소경이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앉은뱅이도,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살았겠습니까? “내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태어났을까? 또 앉은뱅이도 서러운데, 은과 금 마져 내게 없으니… 아 참으로 내 신세가 비참하기 그지없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암담한 현실을 앞에 두고, 불평하며 불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내 처지가 이렇습니까?” “왜… 내가 하는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까?” “왜 나를… 암에 걸리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하소연을 하면 인생을 비관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빈궁한 삶과… 질병 중에 허덕이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뜻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참된 신앙은… ‘고통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잘 풀리고 평안할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감사는, ‘시련의 터널’을 통과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비록 불확실한 삶이고, 그래서… 너무나 방황하기 적절한 광야와 같은 황무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나를 배반하고, 좌우를 둘러봐도 도무지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시편 121편 말씀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시121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는 오늘도, 영적으로 황량하고 메마른 거친 땅 광야 길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 많은 위험과 시련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절망의 늪에 빠진 앉은뱅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하였듯이, 오늘 빈궁한 삶속에서 허덕이는 우리들 심령 속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은과 금으로 채울 수 없는 놀라운 하늘의 복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2.예수그리스도 이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을 써보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한 푼만 줍쇼”하고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그를 유심히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결심한 양,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시오” 오늘 본문 4절과 5널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유심히 눈여겨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이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드로는 그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였고,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눅10:30 이하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제사장도 그냥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 사람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마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도와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끝으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실천할 때, 이것이 곧 능력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우리속에 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 거지 앉은뱅이를 바라보고 불쌍히 여겨… 주목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앉은뱅이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앉은뱅이 생각에는… 은과 금을 기대했습니다. “최소한… 몇 푼은 받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그만… 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 때, 다행히도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불뱀 모양의 놋뱀을 만들어서 기다란 장대 위에 달아,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살게 해 주셨습니다. 민21:9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끝내 고집을 피우면서, 고개를 땅에 떨구고 모세의 말은 듣지 않있던 사람들은… 놋뱀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들어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쳐다보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는, 은과 금을 기대하면서 베드로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짧은 순간의 순종이… 엄청난 축복으로 이어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6절 말씀 봅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아멘.
지금 이 앉은뱅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앉은뱅이도 능히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인 줄로 분명히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안에도, 베드로가 품었던 이 믿음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때 베드로는, 보잘 것 없는 계집 종 앞에서도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도무지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한 때, 자신의 칼과 창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단숨에 칼을 뽑아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 쳐서 떨어 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26:52, 막14, 눅22, 요18)고 교훈하셨습니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면, 은과 금 때문에 망합니다.
베드로는 한 때, 자신의 칼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은과 금을 의지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당당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선포하면서, 오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어쩌다가 한 번… 성전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면, 그들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루에 3번씩… 내 집 드나들 듯이 다니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수시로 성전에…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다가 한 번씩 성전 미문앞에 나가서… 구걸한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날마다…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다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와 요한도 수시로 성전에 출입하였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도,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이들은 서로 안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관계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날, 제 구시 기도시간에 이와같은 능력이 일어났겠습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이 기록되기 전,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그 성령강림이 있은 후… 그 날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 본문…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의 현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령은, 심령이 가나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죄의 사슬에 얽매여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압박당하고 눌린자를 자유케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관원들과 장로들은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베드로와 요한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기탄없이 말하기를, “하나님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 봐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오직, 하나님편에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령이 그 속에 충만하였고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찌… 의사도 아닌데, 사람의 질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의사라고 해도, 어찌 앉은뱅이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으켜…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또 베드로는… 하루에도 삼천명, 오천명을 주님 품으로 인도했다고 했는데, 어찌…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을 회개시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눅18:27). 이같은 이적과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우리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에 더욱 더 힘쓰고,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며, 약속의 말씀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난생처음, 두 발로 걸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나도 걸을 수 있다. 이것봐라! 나도 걷는다”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또 껑충 껑충 뛰어보기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 어리둥절하여 말문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앉은뱅이 된 자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는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거지가 아니라,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상처 입은 자를 싸매어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성도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받은 바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자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전의 옛 모습은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금과 은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것들이 세상에서 최고인양 생각되었지만, 이제 우리의 삶은, 썩어질 육신의 것들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금보다도 더 귀한 영생 얻었음을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열등감이 사라지고… 우울증도 사라지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주님 때문에 감사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태풍이 몰아닥쳐도 날개 짓하며 창공을 향해 더욱 힘차게 올라가는 독수리처럼,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사40:31).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시련에 떨지 않습니다. 몸이 좀 약하면 어떻습니까? 물질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세 시대에 수도원에서 자라 사제가 된 ‘에라스무스’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 당시, 카톨릭에 머물면서 카톨릭을 비판한 사제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 성당이 한참 지어지고 있을 때, 은과 금을 실은 마차 행렬이 줄을 잇자,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서는, 이를 흡족히 여기면서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풍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에라스무스가 바티칸에 있는 교황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많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제 더 이상…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중세 시대를 가리켜, 많은 역사학자들은 캄캄한 ‘암흑시대’ 또는 식물이 자랄수 없는 ‘불모시대’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은과 금은 풍성했지만, 교회가 세속화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캄캄한 암흑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또한 말씀을 통해서… 물질의 풍요나 육신의 안락이 생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가장 큰 힘이 되며, 능력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와 같은 거치른 땅을 통과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 힘을 얻고, 언제나 당당히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을 주십니다.
베드로의 입술을 열어서 앉은뱅이에게 외쳤던 그 외마디 선포는, 바로 성령님이… 베드로를 입술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넘어지고 자빠진 앉은뱅이 같은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우리 심령 속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또 때로는… 환란과 시련이 우리앞에 닥쳐와도,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걸어가기를…
3.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모하며 불렀던 경험에 대하여 말해보자